신간 시집에 대한 변명
김욱진 『참, 조용한 혁명』/시문학사
나는 나에게 속았다
작금의 시류가 참, 수상하다. 우연찮게도 『참, 조용한 혁명』이라는 이번 나의 시집 제목이 현 대한민국 상황을 관통하고 있다. 사회학에서 사회변동을 설명하는 개념이 네 가지가 있는데, 변화 속도에 따라 진화와 개혁, 혁명과 쿠데타 등으로 구분한다. 진화는 매우 느린 속도로, 개혁은 점진적으로 변화시켜 가는 과정을 말하며, 혁명과 쿠데타는 단시일 내에 사회 전반을 변화시키는 양상을 의미한다. 쿠데타는 비합리적이고 무력적인 방법으로 사회 변동을 꽤하는데 반해, 혁명은 합리적 평화적 절차를 통해 정치 사회 경제 전반의 변화를 추구한다. 그러면 우리는 현재 어떤 변화 방식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생명력을 가진 모든 존재들의 바탕에는 공히 ‘나’라는 주체가 상존한다. 새는 새 대로 나무 는 나무 대로 꽃은 꽃 대로 저 나름의 주체 의식과 본능적 의지를 양심껏 표출하며 살아간다. 저들은 언제 어디서나 화합하고 공존하며 조용히 살다 떠나간다. 나는 지금 무슨 생각과 행동에 머물고 있는가. 길을 잃어버린 대한민국은 지금 어디에 표류하고 있는가를 새삼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허겁지겁 살다 보니 여태 못한 숙제가 태산 같다. 나에게 주어진 과제는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뿐이라는 결론에 닿는다. 이 과제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내게 와 닿는 데만도 반평생이 걸렸다. 그나마 참, 기적이다. 나라고 나서는 놈들이 왜 그리도 많은 지. 나만 이렇게 헷갈리는가 싶어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못한 채 혼자서 끙끙 앓아야만 했던 대한민국 땅. 언제부턴가 나는 조용히 물어보았다. 날아가는 새들에게, 무심한 돌들에게, 나를 스쳐 지나간 꽃과 나무와 물과 바람들에게 간절히 물어보는 습이 생겼다. 내게로 돌아온 무언의 답은 '나도 그래'였다. 이젠 나도 모르게 궁금해지는 나를 순간순간 만나고 있다. 더부살이하는 그놈들을 편하게 나라고 부른다. 나는 낯설지 않다. 우리는 매일같이 나를 펴놓고 함께 숙제를 한다. 숙제를 하고, 검사를 맡는 일상만으로도 배부르다. 낮에는 해에게 밤에는 달에게 해도 달도 보이지 않는 날에는 나에게 숙제 검사를 맡는다. 그럴 때마다 나라는 놈들이 버려두고 간 말들을 꼼꼼히 받아 적었다. 그때그때 주워 담아둔 부스러기들이 나의 시로 둔갑했다.
버릇없이 /나도 아닌 것이 /나처럼 달라붙어 /나를 먹는 놈 /곰살갑게 굴 때는 귀엽더니 /이제는 나를 먹잇감으로 넘보기까지 /그렇다고 모르는 척하기도 뭐하고 /붙잡아 둘 수도 없는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나 /더부살이하는 나를 향해 /절박한 심정으로 물어본다 /나 먹는다는 건 /꼭꼭 숨은 나를 찾는 일 /때로는 /깜빡깜빡 까먹고 /나도 모르게 헛구역질하는 /그놈의 나는 대체 누구인가 (그놈의 나1, 전문)
나는 그놈들이 진짜 나인 줄 알고 졸졸 따라 다녔다. 그놈들은 지독하게 길들여진 도둑이었다.
나는 도둑이었다 /이 세상 와서 보니 /훔치는 것보다 쉬운 일은 없다 /그토록 길들여 진 마음 /녀석은 하루에도 수없이 /이곳저곳 서성거리며 뭐든지 다 훔쳤다 /눈 깜짝할 사이 그놈은 /주인 없는 집 돌아다니며 /주인 행세하였고 /때로는 주인 앞에서도 버젓이 훔쳤다 /그러나 주인은 /한 번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놈은 나의 종이었고 /나는 그놈의 주인이었다 /그놈의 나는 도둑이었다 (그놈의 나2, 전문)
아직 내게는 못 다한 말이 남아있다.
자장면 한 그릇 천 원 할 때 /세 그릇 값으로 시집 한 권 샀던 그 시절 /나는 쫄쫄 굶긴 배 띄워놓고 배부른 척하다 /신세타령만하는 비렁뱅이 /시인이 되고 말았다 /책장에 꽂힌 해묵은 시 몇 편 거들먹거리며 /유명시인 헐값에 다 팔아먹고 /이젠 골방으로 밀려난 시의 집들마저 /경매로 넘겨야 할 판이니 /내게로 와 굶어죽은 시혼들이여 /지렁이처럼 구불텅구불텅 기어가다 /걸려 넘어지고 잘리고 짓밟힌 숱한 문장들이여 /그대 못 다한 말, 못 다한 저녁의 풍금소리 /언제쯤 울려 퍼질 것인가 /골방에 골백번 더 처넣었다 건져낸 말 /아, 누가 숨은 상상과 행간의 말들을 읽고 갈까 /자장면 한 그릇 값도 채 안 되는 나의 집 나의 시집 /골방에서 말을 잃은 이 밤 (못 다한 말-골방에서, 전문)
뒤돌아보니 나의 시는 온통 나라는 가시덤불 속에 뒤엉켜 있다. 여태 나의 영혼을 보듬어준 땅과 물과 불과 바람 그리고 나를 스쳐 지나간 수많은 꽃과 새와 나무와 돌들에게 참, 부끄럽다. 끝으로 『참, 조용한 혁명』의 시편 되뇌고 싶다.
거짓과 혼돈이 난무하는 세상, 참 /꽃으로 뿌리내린 비슬산 /사월의 민심은 /아래서부터 위로 /붉게 붉게 번져 /천심을 사로잡았다 /보이지 않는 손들의 /참, 조용한 혁명이다(참, 조용한 혁명,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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