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에씨
시를 왜 짓는가, 라는 물음에 씨는 그냥
문득 떠오른 누에처럼 시를 짓는다고 실실 얼버무리자
누에는 금세 전생으로 돌아가 알을 슬었고
뭔가를 짓는다는 좁쌀 만 한 생각으로
알은 꼬물꼬물 거리기 시작했다
까막눈으로 돌가루 종이 위에 뒹굴다가
평수 넓은 신문지로 이사 와서는
뽕잎처럼 잘게 쓴 시를 다문다문 읽는 기분으로
시상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한 줄 두 줄
행간이 생겼고, 거기에 누워 먹고 싸고 잠자면서도
온몸에 뭔가 허전한 구석이 늘 배어있음을 느끼고부터
누에는 자나 깨나 오고 가는 길 묻고 물으며
잠잠히 시를 짓기 시작했다
한 잠을 자고 나서는
허기를 참지 못해 뽕잎에만 눈독을 들였다고
두 잠을 자고 나서는
뽕잎에 딸려온 오디 맛을 난생처음 보았고
어딘가에 뽕나무가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였다고
석 잠을 자고 일어나서는
허구 많은 시상이 눈앞에 아른거려 헷갈리기 시작했다고
넉 잠을 자고 깨어나서는
섶처럼 얼기설기 얽힌 이 세상
나 아닌 나가 없더라고 한 줄 딱 적었다
그 순간, 누에는 오간데 없고
나는 한 마리 번데기 되어
누에가 지어놓은 집 단박에 다 부숴버리고
시 한 수 읊고 돌아가는 나
방이었다
(2020 문예운동 가을호, 2020 텃밭시학 연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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