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
1
꽃내음 그윽한 초여름 밤, 나는 어느 산골 마을 한 모퉁이서 옹골찬 밤송이로 태어났어 바람이 불 땐 고슴도치처럼 온몸을 웅크리고 눈감은 채 바람결 따라 허공을 찔러대며 하염없이 막춤을 추었지 누군가 내 곁으로 와 간간이 노래도 불러주었고, 더러는 내 이름을 부르며 지나가는 목소리도 어렴풋이 들렸어 그러나 손 한번 따스하게 잡아주는 이 없었어 터질 것만 같은 가슴으로 나는 바깥세상을 쿡쿡 찔러보았어 여기가 어딜까? 나는 누구일까? 몹시도 궁금해지던 어느 날, 현기증이 날 만큼 세찬 바람이 불었어 그제야, 나 홀로 어딘가에 매달려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 온 뼈마디가 휘어 터지도록 허공에 매달려 몇 날 밤을 그렇게 버텼어 정신을 가만 차려보니 어느 늦가을 햇살 한 무더기 다가와 떡 벌어진 나의 어깨를 자근자근 주물러주고 있었지
2
순간, 나의 눈은 심 봉사처럼 버쩍 뜨였고, 온 세상이 다 내 눈 속으로 빨려들어오는 것만 같았어 나는 한 톨의 밤알이었지 하늘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고 물이 흐르고 새가 울고 꽃망울이 지고 산짐승들의 겨우살이 준비하는 모습도 보였어 가까이 사는 피붙이들의 얼굴도 보이기 시작했지 여태, 나만 홀로 허공에 매달려 있는 줄 알았는데, 나를 빼닮은 얼굴이 이렇게도 많은지? 이 세상에 태어나 말 한마디 해보지 못하고 살아온 이산가족처럼 혈육들의 눈빛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어 이런 줄도 모르고 바람둥이처럼 오가는 사람들은 나의 속살만 흘깃 훔쳐보며 군침 흘렸지
3
아직도 내 몸속엔 벌들이 핥고 간 달콤한 키스의 향기가 남아 있는지, 어디선가 날아온 산까치 한 마리 내 곁에 바짝 다가앉아 둥지 쪽으로 발을 굴리며 날개 짓을 했어 늘 귀찮게 구는 잔바람인 줄 알았지 해거름 햇살에 기대어 하품하며 졸고 있던 나는, 그만 으슥한 가시덤불 속으로 운석처럼 떨어지고 말았어 밤이 되자 산짐승 발자국소리도 들려왔지. 갈수록, 내가 매달려 있던 그곳이 점점 그리워졌어 밤참 구하러 온 다람쥐 몰래 나는 살몃 눈을 뜨고 허공을 올려다보았지 어느 새 그곳엔 별들만 소복 모여앉아 내 안부 소곤소곤 묻고 있었어 외톨이로 살수록 세상 소린 더 맑고 고요하게 들리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