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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 살롱 / 최은우

숲에 살롱 최은우 자꾸 이야기하다 보니 말이 생깁니다 기분이 달라지고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기분 탓인가요? 그러자고 한 건 아닌데 수다장이가 돼서 오물조물 오래 씹어 쉴 새 없이 꺼냈어요 이야기라면 해도 해도 할 게 많아요 귀를 여는 자가 없다면 저 무성한 나뭇잎들이 있잖아요 이리 와서 들어봐요 늘 같은 이야기지만 오늘은 하나 더 추가시킬 예정이에요 극적인 요소는 늘 있어요 마녀들이 밤에 모여 항아리에 대고 떠들던 주문 같은 것도 있다니까요 인생은 재미 아니겠어요? 문밖 무성한 화분들은 신경 쓰지 마세요 이야길 엿듣고 흉내 내느라 줄거리가 아니 줄기가 생겨서 풍성해졌어요 염치도 없이 나무 옆에 나무를 낳네요 자꾸만 나무들이 생기는 오후에 하나 더 있다고 하나 더 없다고 나무가 나무 아닌 것은 아니겠..

♧...참한詩 2022.06.01

홍길동이 성춘향에게 / 이종근

홍길동이 성춘향에게 이종근 내게도 봄내 그윽한 매화인 듯 나눠 주겠소 연거푸 몇 번 속내 드러내듯 프러포즈하는 서찰 꼬깃꼬깃해서 보냈건만 따뜻한 공깃밥 구경은커녕 편히 잠 이룰 수 없는 밤이 길었소 나 역시도 아버지 정이 진정 그리워 어린 나이 내내 회앓이로 아팠고 한동안 피 토하듯 소낙비로 울었소 광한루원(廣寒樓園) 곳곳이 풋바람 나고 요천(蓼川)의 흐르는 물 건너는 각기 다리마다 후들후들하오 그 변치 않을 절개 때문에 남원골 찾아왔소 본디 내 족보는 열에 아홉 중 탐탁지 않고 가슴팍에 숨긴 마패의 힘이 없어도 애끓는 순정은 과히 그넷줄의 품 넘친다오 어서 강 따라 바다 건너 평등 이룬 섬 저어기 율도국(栗島國)으로 함께 가오 서자(庶子)의 격한 울분이고 차분한 반란이오

♧...참한詩 2022.05.26

오월 / 유홍준

오월 유홍준 벙어리가 어린 딸에게 종달새를 먹인다 어린 딸이 마루 끝에 앉아 종달새를 먹는다 조잘조잘 먹는다 까딱까딱 먹는다 벙어리의 어린 딸이 살구나무 위에 올라앉아 지저귀고 있다 조잘거리고 있다 벙어리가 다시 어린 딸에게 종달새를 먹인다 어린 딸이 마루 끝에 걸터앉아 다시 종달새를 먹는다 보리밭 위로 날아가는 어린 딸을 밀짚모자 쓴 벙어리가 고개 한껏 쳐들어 바라보고 있다

♧...참한詩 2022.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