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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 / 길상호

덤 길상호 감자 한 바구니를 사는데 몇 알 더 얹어주며 덤이라 했다 모두 멍들고 긁힌 것들이었다 허기와 친해진지 오래인 혼자만의 집, 이 중 몇 개는 냉장고 안에서 오래 썩어가겠구나 생각하는 조금은 비관적인 저녁이었다 덤은 무덤의 줄임말일지도 모른다고 썩어가기 위해 태어난 감자처럼 웅크리며 걸었다 하긴 평균연령 40세를 넘지 못하던 시대가 바로 얼마 전이었는데 나는 지금 덤으로 살고 있는 것 아니지 덤으로 썩고 있는 것 상처를 모르는 철없는 싹처럼 노을 뒤에서 별 하나가 겨우 돋았다 덤으로 받아든 감자 몇 알이 추가된 삶의 과제처럼 무거운 길, 한 번도 불을 켜고 기다린 적 없는 집은 오늘도 무덤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참한詩 2022.05.15

까치 설날

까치 설날 설이, 설익은 설이 감나무골 둥지 틀고 사는 까치네 동네까지 설설 왔네요 까치발 들고 이 집 저 집 묵은 세배하며 돌아다니던 섣달그믐날 까치는 장돌뱅이 김 영감네 처마 밑 서리서리 엮어둔 과메기 한 동가리 쪼아 먹고, 꾸벅 옆집 꼬부랑 할머니 장독대 위 정안수처럼 떠놓은 감주 한 모금 고수레하듯 던져준 콩강정 한 조각 받아먹고, 꾸벅꾸벅 봉당에 벗어둔 꼬마아이 코고무신 한번 신어보고도, 꾸벅 오늘은 우리우리 설날이라며 마냥 설레던 밤 잠자면 눈썹 센다고 온 동네 소꿉친구 다 모여 이거리 저거리 각거리 천두만두 두만두… 각설이 타령하듯 흥얼거리며 밤새 잠 설쳐댄 까치 설날 이 설도 머잖아 눈 녹듯 사라져버리겠지요 (2022대구문학 4월호)

♧...발표작 2022.05.12

손님 / 오탁번

손님 오탁번 엄마가 어린 딸을 데리고 시장 가는 길 감나무에 조랑조랑 열린 풋감을 보고 '푸른 감이 가을이 되면 빨갛게 익는단다' 엄마 말에 고개를 갸옷갸옷 하던 딸은 감나무가지가 휘어지도록 우는 매미울음 따라 엄마 손 잡고 까불까불 걸어갔네 ​ 가을 어느 날 해거름에 시장 가는 길 빨갛게 익은 감이 탐스러운 감나무가지에 하얀 낮달이 꼬빡연처럼 걸려 있었네 다 저녁에 되어 엄마 손잡고 돌아올 때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고 딸이 말했네 '엄마, 달님이 그새 빨갛게 익었어' ​ 개미가 기어다니는 보도블록을 걸어오는 길 엄마가 까치걸음 하는 딸을 보고 눈을 흘기자 '아기 개미를 밟으면 엄마 개미를 못 만나잖아?' 앙증스러운 어린 딸의 말을 듣고 엄마는 처녀적 시인의 꿈이 다시 생각나 미소지었네 시인은 못 됐..

♧...참한詩 2022.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