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731

줍다 / 나희덕

줍다 나희덕 ​ 조개를 주우러 해변에 갔었어요 검은 갯벌 속의 조개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건 빈 껍데기뿐이었지요 ​조개를 줍든 이삭을 줍든 감자를 줍든 상자를 줍든 ​몸을 최대한 낮추고 굽혀야 한다는 것 무엇을 만들거나 사지 않아도 돼요 줍고 또 줍는 것 이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죠 ​쓰레기, 라는 말을 너무 함부로 쓰지 않나요? 누군가 남긴 음식이나 물건이 그렇게 표현되는 건 슬픈 일이지요 그들은 버림으로써 남긴 거예요 나의 나날은 그 잉여만으로도 충분해요 ​어떤 날은 운이 아주 좋아요 누군가 먹다 남긴 피자가 상자째 놓여 있기도 하지요 ​유통기한이 지났지만 신선한 통조림 기분좋은 말 몇 마디나 표정을 주워오기도 해요 이따금 인상적인 뒷모습이나 그림자를 줍기도 하지요 ​자아, 둘러보세요 주울 것들은 ..

♧...참한詩 2022.07.20

옻골마을

옻골마을 김욱진 물빛 시회 연다는 소문만 듣고 꼭꼭 숨겨진 옻골 어렵사리 찾아갔다 북에는 팔공산 동에는 검덕봉 서로는 긴 등이 못 안골까지 이어져 병풍처럼 펼쳐지고 남으로는 느티나무 고목들이 숲을 이룬 옻골 사방을 둘러봐도 옻나무 한 그루 눈에 띄지 않는데 옻골이라고 마을 들머리 옷걸이처럼 걸렸다 금세 나는 옻에 닿았다 '칠하다' '칠흑 같다' 라는 말, 문득 시절 인연처럼 왔다 간다 그래, 오늘의 시제는 '칠하다'가 좋겠어 양지는 음지를 칠하고 음지는 양지를 칠하며 사백 성상 뿌리내린 경주최씨 세거지 옻나무 골까지 왔으니 이참에, 옻닭이라도 한 마리 푹 꽈먹고 여태 썩고 썩은 속 옻칠이나 해둬야겠다 대암산 꼭대기 우뚝 솟은 거북바위 등처럼 거무죽죽하게

♧...발표작 2022.06.30

하늘나라의 옷감 / 예이츠

하늘나라의 옷감 예이츠 내게 금빛 은빛으로 수놓아진 하늘의 옷감이 있다면 밤의 어두움과 낮의 밝음과 어스름한 빛으로 된 푸르고 희미하고 어두운 색의 옷감이 있다면 그 옷감을 그대 발밑에 깔아드리련만,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은 꿈밖에 없으니 그대 발밑에 내 꿈을 깔아드리오니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그대가 밟는 것은 내 꿈이기에.

♧...참한詩 2022.0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