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을 끌고 간다/박남희 노을을 끌고 간다 박남희 둥근 것이 노을을 끌고 간다 노인은 자전거에 누런 호박을 싣고 저무는 뚝방길을 간다 익어가는 아침은 눈부시지만 익은 저녁은 슬프다 익은 것은 때때로 노을이 된다 노을에 호박이 익고 호박 속에 든 여자가 익는다 얼마 전에 주민등록증이 말소된 여자 비로소 둥근 여자가.. ♧...참한詩 2010.06.28
성탄제/김종길 성탄제 김종길 어두운 방안엔 빠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 ♧...참한詩 2010.06.10
강우/김춘수 강우 김춘수 조금 전까지는 거기 있었는데 어디로 갔나, 밥상은 차려놓고 어디로 갔나, 넙치지지미 맵싸한 냄새가 토를 맵싸하게 하는데 어디로 갔나,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말이 없나, 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온다. 내 목소리만 내 귀에 들린다. 이 사람이 어디 가서 잠시 누웠나, 옆구리 담.. ♧...참한詩 2010.06.10
서해/이성복 서해 이성복 아직 서해엔 가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거기 계실지 모르겠기에 그곳 바다인들 여느 바다와 다를까요 검은 개펄에 작은 게들이 구멍 속을 들락거리고 언제나 바다는 멀리서 진펄에 몸을 뒤척이겠지요 당신이 계실 자리를 위해 가보지 않은 곳을 남겨두어야 할까봅니다 내 다 가보.. ♧...참한詩 2010.06.10
[스크랩] 눈물의 힘- 김연아의 눈물/ 박정원- 시평 2010 여름호 눈물의 힘 - 김연아의 눈물 박정원 눈물에게도 길이 있다 혼자 걷다 골목 끝에서 그만 주저앉은 길, 예리한 칼날로 받쳐 올린 길, 수천수만 번 스스로 일으켜 세운 길, 빙벽 직전 멈췄다가 이어놓은 길, 그 길 한가운데에서 가난한 어머니의 촉촉한 눈빛이 라면을 먹는다 아버지의 헛기침소리가 강소주.. ♧...참한詩 2010.06.08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이가림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이가림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모래알 같은 이름 하나 불러 본다 기어이 끊어 낼 수 없는 죄의 탯줄을 깊은 땅에 묻고 돌아선 날의 막막한 벌판 끝에 열리는 밤 내가 일천 번도 더 입 맞춘 별이 있음을 이 지상의 사람들은 모르리라 날마다 잃었다가 되찾는 눈동자 먼 부재의 저편.. ♧...참한詩 2010.05.27
가을 노트/문정희 가을 노트 문정희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몸을 떨었다 못다 한 말 못다 한 노래 까아만 씨앗으로 가슴에 담고 우리의 사랑이 지고 있었으므로 머잖아 한 잎 두 잎 아픔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아 벼 베고 난 빈 들녘 고즈넉한 볏단처럼 놓이리라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물.. ♧...참한詩 2010.05.27
하루 열반 들다/송화 하루 열반 들다 송화 긴 산 그림자 마을을 쫓아 내려온다 신기루를 쫓던 까만 눈동자 자박자박 노을 속을 걸어다닌다 저녁 속으로 잠적해버린 주검의 입자들 살포시 어둠이 든다 툭툭 터지는 제비꽃씨처럼 저녁별이 뜨고 동짓달 초닷새 젖니 같은 달 엉금엉금 기어나온다 풍선껌처럼 한.. ♧...참한詩 2010.05.25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외 다수/정희성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 ♧...참한詩 2010.05.25
강물 외 다수/정호승 강물 그대로 두어라 흐르는 것이 물이다. 사람의 용서도 용서함도 구하지 말고 청춘도 청춘의 돌무덤도 돌아보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흐르는 것이 길이다. 흐느끼는 푸른 댓잎 하나 날카로운 붉은 난초잎 하나 강의 중심을 향해 흘러가면 그뿐 그동안 강물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강물이 아니었다 절.. ♧...참한詩 2010.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