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한詩

숲을 지나다/천양희

김욱진 2013. 12. 29. 11:21

          숲을 지나다 
                     천양희


 


바람소리 왁자지껄 우이령을 넘는다. 바람보다 먼저
넘은 세월이, 어깨를 반쯤 골짜기에 묻고 있다. 벼랑
아래 손목도 놓아버리고 산자락도 놓아버려, 나무들의
귀때기가 파래진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 오
월에, 일제히 일어서는 초록의 고요. 잎사귀마다 생생
한 바람소릴 달고 있다. 산길을 따라왔던 마음이 능선
아래 멈춘다. 산자락 찢어 덮을 것이 있다. 잡목숲에
내려앉은 어둠의 속. 비탈길 올라가는 숨찬 生의 속.
덤불속 풀여치 눈도 뜨기 전에, 멀리 도봉이 몸을 불
쑥 밀어올린다. 놀란 내 발이 길을 바꾼다. 바뀐 길
끝에 버티고 선 늙은 불이암. 不二, 不二 하며 나를
향해 두 눈을 부라린다. 이제야 너와 내가 無等임을
알겠다. 무소새 한 마리 문득, 숲에서 달려나온다. 이
시간에, 나는 왜 어머니 생각이 날까. 초록세상이 이
렇게 좋다. 숲을 지나며 나는 말끝을 흐린다. 더 갈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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