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물화처럼
이기철
하늘의 파란색이 아니라면 슬프지 않을 것이다
너무 맑은 것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작은 생각 끝에 등불을 다는
자꾸 만져지는 손끝의 백 년
제 가지에 작년의 목댕기를 매고 나온 새를 앉힌
살구나무가 혼자 살고
가끔은 하루만 묵고 가겠다는 구름도 함께 산다
몇 되의 햇빛을 싸들고 저자에나 가볼까 생각는 시간에도
내 단짝 살구나무는 제 살구 익히는 일에만 골똘하다
나는 그게 슬퍼서 비비새를 초청가수로 청하기도 한다
정말 생활을 이렇게 화분처럼 내려놓아도 되는가?
이런 생각은 너무 잦아서 전혀 새롭지 않다
그러자 정말 거짓말처럼 살구나무가 꼭대기에서 저녁 빛을 데리고 돌아왔다
내 글이 시가 되리라 생각는 것조차 송구한 날
참으로 맑은 생이란 저녁이슬 같은 것은 아닐까 싶은!
—《시와 표현》2017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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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1972년 《현대문학》등단. 시집 『청산행』『지상에서 부르고 싶은 노래』『유리의 나날』『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나무, 나의 모국어』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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