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게구름 (외 1편)
조정권
뭉게구름은 들풀科에 속해 있다고
한 줄 쓰고, 뭉개고 나서
뭉게구름은 여름풀과에 속해 있다고
고친 다음,
뭉게구름은 무허가건물과에 속해 있다고
다시 고쳐 쓴 다음,
이렇게 고쳐도 되나 하고 또 손 놓고 있는데
토란 잎에서 연필 깎는 소리가 들려와
귀로 헤쳐 본다.
잎사귀 밑에 기거하던 달팽이가 기어 오다
어디론가 숨어 버렸다.
이비인후과 의사는 나에게 소음성 난청 진단을 내렸다.
귓속 달팽이관이 망가졌다는 것이다.
길바닥에 나앉은 내 귀도 무허가건물과에 속할 것이다.
청력 검사 하고 고막 치료 받고
흰 알약 받아 오는 길
앞으로 내 귀는 우이독경의 경지로?
뭉게구름 앉아 계신 독경대 밑이나
하늘의 풀 뜯는 마소 옆에서 마이동풍?
뭉게구름을 쳐다보고 뭉개고 또 뭉개다가
토란 잎사귀 사이
갈지자로 걸어다녔던 달팽이가 잃어버린
비의 지갑 하나를 주웠다.
빗방울이 깨트린 파꽃이 하얗다.
새에게 준 시 1
뒤 숲에서 새알을 하나 주웠다.
산성비에 껍질이 얇은 알이었다.
몇 날을 또 몇 날을 품어 주었다.
감감무소식이었다. 속이 엉킨 실 뭉텅이 같았다.
어느 날 아침이다.
밤새 시를 지우다가 날이 밝아 왔다.
내가 남겨 둔 한 줄 끄트머리에서 노란 새가 한 마리 지저귀고 있었다.
인간의 말이 아니라
새의 말로 지저귀고 있었다.
나는 저 말을 잘 기르고 싶다.
하지만 내겐 그 한 줄만으로도 족한 것 같다.
어디다 발표할 게 아니고 잘 묻어 줄 시니까.
— 시집『고요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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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권 / 1949년 서울 출생. 197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시편』『허심송』『하늘이불』『산정묘지』『신성한 숲』『떠도는 몸들』『고요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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