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욱진
조선일보사가 주최하고 신한은행이 후원하는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단지 사회과 교사라는 자격만으로 나에게 주어져 기분이 얼떨떨했다. 일본 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우리 민족의 유적과 유물을 답사함으로써, 일본 문화의 원류가 한민족임을 확인하는 매우 의미 있고 소중한 여행이 될 것이라는 설렘도 있었지만, 사회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솔직히 책이나 매스컴을 통해 고작 보고 듣던 일본 문화의 어제와 오늘을 직접 피부로 느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훨씬 컸다. 그러나 떠나는 날이 또박또박 다가올수록, 사립 인문계 고교에 몸담고 있는 현실에서 저 홀로 얌체처럼 학기 중에 여행 성격의 해외연수를 간다는 것이 왠지 부담스러웠다.
12월 6일 아침, 막상 열차에 몸을 싣고 출국 집결지인 부산항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내내 우리 학생들과 그리고 함께 근무하는 여러 선생님들의 얼굴이 차창 너머로 스치는 겨울 나뭇가지의 눈처럼 자꾸만 아른거려 송구한 마음 가눌 길 없었다. '타 학교 선생님들보다 더 많이 보고 듣고 느끼고 돌아와 우리 학생들과 선생님들께 보다 재미있고 정직하게 들려줘야지'하며 스스로 위로하는 사이, 나의 발자국은 벌써 2만3천 톤급 '후지마루'라는 배 위에 붉게 드리워진 저녁 노을과 함께 머뭇거리고 있었다.
마침내, 온종일 지친 여행 가방은 나의 다섯 손가락을 꼭 거머쥐며 일주일 동안 머물 숙소로 빨리 들어가자고 보채는 듯했다. 그제야 동고동락할 선생님 세 분과 406호에서 반갑게 첫인사를 나누고, 우린 약속이나 한 듯 가벼운 옷차림으로 4층 뱃머리에 우두커니 나가 섰다.
물결처럼 잔잔히 흐르는 경음악
틈새로 울려 퍼지는 뱃고동소리
바닷길이 열리고
항구의 불빛 점점 뒷걸음질친다
가만 눈을 감는다
누군가 허전한 배의 꼬리 물고
자꾸 뒤따라오는 것만 같다
여태 무심히 대했던 조국 하늘의 별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정겹게 숨쉬는 땅위의 집들과
더러 힘겨운 세상살이, 말끔히 씻어주곤 하던 바다 내음
어둠 속으로 살며시 어머니처럼 마중 나와
내 가슴을 뜨겁게 문질러댄다
선조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백의종군해 달려갔던 사내처럼
섬이란 섬 다 경계하며
대마도를 지날 무렵
칭얼거리던 휴대폰마저 가쁘게 숨 몰아쉰다
난생 처음 밤배를 타고
그대에게 마지막 떨림의 여운을 남기는 순간,
칡넝쿨처럼 얽히고 설킨 생각들과
말못할 부끄러운 몸짓들
곤히 잠든 밤바다를 흔들어 깨운다
배는 어느새 잔뜩 취해버리고
꿈꾸던 아기별들은 재롱이 한창이다
어디선가
숨바꼭질하며 달려온 초승달은
알몸으로 저 바다에 누워
나랑 벗하며 사이좋게 노를 젓는다
(현해탄을 건너다-선상에서 전문)
아물거리던 불빛조차 더 이상 보이질 않는다. 오 백 명의 단원들이 두 조로 나뉘어 선내에서 첫날 밤 저녁 식사를 마치고, 6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강의실에서 백제 중심의 고대사 강의를 진지하게 들었다. 난생 처음 밤배를 타고 끝없이 넓은 바다 위에서 하루를 정리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칡넝쿨처럼 얽히고 설킨 생각들과 말못할 부끄러운 몸짓들이 파도 속에 부서져 출렁거렸다. 우리 영해를 벗어나 대마도를 지날 무렵, 바람은 곤히 잠든 밤바다를 흔들어 깨웠다.바다에 누워 잔뜩 취해버린 선상엔 어느새 꿈꾸던 아기별들 사뿐 내려와 재롱을 부렸다. 시린 눈 반쯤 뜬 초승달도 어디선가 숨바꼭질하며 달려와 나랑 배를 저었다.
7일 새벽 6시경, 배는 후쿠오카 항에 닿았다. 일찍부터 한반도와 중국·동남아 각국과 교류해 오던 관문으로 문화 유산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온화한 기후로 일년 내내 아름다운 바다 경치를 즐길 수 있는 곳이란다. 항구 주위의 사람들은 물건을 싣고 내리느라 대낮같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입국 수속을 마친 후, 우린 대기한 14대의 전세 버스에 나눠 타고 역사 탐방 길에 나섰다.
제일 먼저 들린 곳은 열도의 옛서울 다이자후(大宰府)이다. 이곳은 백제가 멸망하자 倭 열도를 지배하던 濟明女帝(제명은 백제 의자왕의 여동생으로 전해지기도 함)의 아들 황태자 中大兄이 신라군의 침공을 우려해 수성(水城-백제식 토성)을 쌓고 안전한 곳으로 옮겼던 궁성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입구 오른쪽에 자료관 하나 달랑 있고, 궁터의 흔적으론 곳곳에 놓인 주춧돌과 돌기둥 몇 개만 허수아비처럼 서서 까마귀 울음소릴 듣고 있을 뿐…….
그 다음 간 곳은 후나야마(船山) 고분인데, 우리 나라에서 발견된 것처럼 앞이 모지고 뒤가 원형인 특이한 형태의 고분으로 여기서 출토된 금동관모와 금동신발은 공주 무녕왕릉과 익산 백제 고분 등에서 출토된 것과 꼭 같다고 했다. 이 언저리엔 너와집과 더불어 일본의 전통 가옥들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는 반면, 찬란했던 우리 선조의 무덤은 한구석에 초라하게 버려져있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 금할 길 없었다.
이어 九州의 얼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소산(阿蘇山)으로 향했다. 굽이굽이 돌아 오르는 산허리마다 삼나무가 듬성듬성 자라고 있었고, 북쪽 기슭에 걸쳐 전개된 광활한 초원지대인 草天里(쿠사센리)에는 연기를 뿜어내는 웅대한 산을 배경으로 두 개의 연못 주위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으며 무리 지어 있는 소와 말의 모습이 흡사 제주도 한라산을 연상케 했다. 세계 최대의 분화구를 가진 복식 화산으로 지금도 끊이지 않고 분연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곳의 토속 음식을 점심으로 먹고 산 중턱에서 1시간 반정도 주변 경관을 둘러본 뒤, 버스로 2시간쯤 달려 일본 최대의 온천 지역인 벳부에 도착, 언덕 위에 뱀처럼 길쭉하게 누워있는 모습의 스기노이 호텔로 들어섰다.
일본인처럼 걸쳐 입은 유카타(목욕할 때 입는 일본인의 옷)와 게타(나막신)를 옷장에 벗어두고 대중탕에 들어앉아 밖을 내다보니 벳부시가 한 눈에 들어왔다. 온천지대인지라 시내 곳곳에서 뿜어대는 수증기가 마치 우리 나라의 한적한 시골 저녁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벳부역 주변이 제일 번화한 온천가로 큰길을 끼고 크고 작은 여관과 기념품가게, 카바레, 오락실, 극장 등이 밀집해 있다.
8일 오전, 벳부의 유명한 온천 관광지 가운데 하나인 '海의 地獄'과 '血의 地獄'을 구경하고 인접한 오이타시의 원숭이 공원을 돌아본 뒤, 벳부시 교육위원회 주선으로 인근의 작은 초등학교를 방문해 일본의 교육 시설을 살펴보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날이 마침 학부모 참관 수업일인지라 부득이 학교 공개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그곳 아이들만 창 너머로 '욘사마'를 외치며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이것도 국가 상호간의 작은 약속이라는 점에서 이해가 잘 되지 않았으나, 소신 있는 학교장의 처신에 놀라움이 더했다.
오후 4시경, 전용선인 후지마루호는 오이타항을 떠나 우리 선조들의 열도 진출로였던 세토나이카이를 밤새 항해하여 9일 오전 7시경 오사카 항에 이르렀다. 서기 794년 교토(京都)로 천도할 때까지 우리 나라 삼국시대의 문화를 받아들여 일본 최초의 국가를 세웠던 곳인 나라(奈良). 그 시내로 들어서면 공원이 하나 있는데 그곳엔 조립식으로 지어진 노숙자들의 숙소가 여기저기 보였고, 좀 더 지나자 세계 최대의 목조 건물인 동대사(東大寺) 대불전이 눈에 확 띄었다. 경내 가는 곳마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사슴을 정겹게 만날 수 있었다.
백제인들의 불심과 기술로 세워진 사찰로, 그 당시 일본으로 건너가 추앙 받던 '행기' 선사의 영정이 절 한 모퉁이에 모셔져 있다는 사실이 퍽 인상적이었다. 우리 나라 절 입구처럼 문 좌우 끝간에 나무로 조성한 인왕상이 두 눈을 부릅뜨고 서 있고, 그곳을 지나면 두 발을 든든히 딛고 단정히 앉은 짐승이 보이는데, 이를 '고마누이'라 불렀다. 일본말로 '고마'는 고구려를, '누이'는 개라는 뜻으로 '고구려 개'가 불법수호를 위해 버티고 앉아 있는 형상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당시 강인했던 고구려 문화의 영향력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었다.
동대사 근처에서 전형적인 일식으로 점심을 먹은 뒤, 산자락에 사뿐 걸터앉은 듯한 모습의 법륭사(法隆寺-호오류지)를 찾았다. 이 가람엔 담징이 그린 유명한 금당벽화는 소실되고 없었지만, 중문·탑·종루 등은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숙소인 배로 돌아가는 길목에 오사카(大阪)의 대형 수족관인 해류관을 구경했다. 우리 나라 63빌딩의 것보다 더 넓고 짜임새 있어 보였다. 저녁 식사 후, 선상 강의실에선 '우리 삶에 시는 왜 필요한가'라는 주제로 시인 정호승 님의 훈훈하고 아련한 자작시 낭송과 더불어 너덜너덜한 우리들의 삶을 잔잔히 녹여주는 시 강연이 있었다. 시집 속으로 가끔 찾아가 뵙던 분을 직접 만나 자연스레 인연을 맺는 것 또한 시를 쓰며 삶을 고민하는 나에겐 더없이 고마운 일이었다.
10일 아침, 교토 지역의 유명한 광륭사(廣隆寺-코오류지)로 향했다. 붉은 소나무로 깎아 만든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법열의 미소를 지으며 고국의 중생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듯했다. 일본의 국보 제1호란다. 두근거리는 가슴 억누르며 가만 눈을 감고 합장했다. 우리 나라 중앙박물관에 있는 국보 제 83호 금동 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쌍둥이 불상이라 할만큼 너무도 흡사하여 가히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버스 안에서 일회용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하고 일본인들의 마음의 고향이라는 비조(飛鳥-아스카)시로 이동해 석무대(石舞臺-이시부타이)를 찾았다. 이곳은 우리 나라에서 발견된 것과 유사한 형태의 석실 고분으로 아직도 이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 백제 후예들이 세운 아스카시의 전경은 마치 우리 나라의 어느 집성촌을 보는 듯한 친근감마저 들었다. 이어 아스카 자료관을 관람한 뒤, 고구려 양식의 채색 벽화로 널리 알려진 고송총(高松塚-타카마쓰쯔까)에 잠시 들렸다. 해는 저물어 서녘 하늘을 쓰다듬고, 이번 유적지 답사를 마무리하는 시점. 우리의 사물놀이 패는 일본 땅을 신나게 밟아댔다. 단풍이 채 가시지 않은 아스카의 늦가을, 억새풀만 하염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선실로 돌아와 뷔페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난 후, 10여명의 선생님들과 오사카 시내로 구경을 나갔다. 대학 시절 한 학기 정도 배운 일본어 실력으로 묻고 또 물으며 전철에 올라 혼마찌라는 역에서 갈아타고 오사카 상권이 집중되어 있는 신사이바시(心濟橋) 역에 내려 일본인들의 밤 문화를 처음 접했다. 바둑판식으로 광활하게 늘어져 있는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고 모두들 바쁜 걸음걸이였다. 즐비하게 늘어선 소규모 가게들은 이방인을 상냥하게 맞아주었다. 백화점에 들러 한 점원에게 문방구 코너가 어디냐고 서툴게 묻자, 그 여성은 3분 정도 걸리는 거리를 직접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또 다른 점원에게 100엔 숍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인터넷으로 확인한 뒤, 프린트한 내용물을 나에게 상세히 설명해 주지 않는가. 정신이 멍했다. 반쯤 정도는 못 알아들었지만, 이게 바로 무에서 유를 만들어 가는 일본인들의 저력이 아닌가 싶었다. 가는 곳마다 출입구에서 당당한 모습으로 최선을 다해 안내하려는 일본 노인들의 눈빛이 그립다.
11일 아침, 일본 역사를 빛낸 장군 세 사람의 업적을 기록해둔 오사카성을 끝으로 관람한 뒤, 10시경 상점 문을 채 열지 않은 신사이바시 시내를 또다시 2시간 가량 쇼핑했다. 이어 오사카시 합주단의 연주 소리를 들으며 오사카항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밤. 선내 강의실에선 6박 7일 동안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모두 함께 가졌다. 흥겨운 사물놀이와 곁들여 깜짝 쇼도 있었다. 여행기간 중 생일을 맞은 선생님들에게 축하 선물을 주는 무대. 엉겁결에 생일 케익의 머리맡에 촛불을 밝히는 주인공이 되어버린 나는, 짧은 순간이나마 강단 위에서 '우리 것을 소중히 잘 간직하고 아껴 역사 속에 부끄럽지 않은 민족이 되기 위한 주체적 역할을 바로 우리가 해 나가자'고 나직이 말하고 싶었는데……아무쪼록 이번 일본 방문은 나로선 잊지 못할 추억거리다
-2005 시문학 2월호, 2005 생각과 느낌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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