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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 /사윤수

폭우 사윤수 비가 이 세상에 올 때 얼마나 무작정 오는지 비에게 물어볼 수 없고 모르긴 해도 빈 몸으로 오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오면서 생각하니 급했던지 다 와서는 냅다 세상의 가슴팍을 때리고 걷어차고 다그친다 무엇을 내놓으라고 저렇게 퍼붓나 내가 비의 애인을 숨긴 것도 아닌데 쏟아붓는다 들이친다 하다가 안 되니까 제 몸을 마구 패대기친다 어쨌든 들어오시라 나는 수문을 열고 비의 울음을 모신다 비의 물고기들이 물밀 듯 밀려들어온다 방 안 가득히 차오르는 빗소리 인사불성 표류하는 비의 구절들 비는 이미 만취가 되었으므로 비가 들려주는 시, 비가 부르는 노래를 나는 알아들을 수 없다 다만, 그래 그래 알았어, 그래 괜찮아 하면서 달랜다, 비의 등을 다독인다 그새 얼마나 울었는지 비의 눈이 퉁퉁 부었다 밤낮을..

♧...참한詩 2022.09.25

그런데, 누가 약장수야? /사윤수

그런데, 누가 약장수야? 사윤수 입에 거품을 물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사자후로 밀어붙이는데 저렇게 열정적으로 약을 파는데 내가 어떻게 약을 사지 않고 베기겠어 약장수의 열변을 들으면 아프지 않은 데가 없고 오만 병에 걸린 거 같고 저 약을 먹지 않으면 머지않아 내가 시들어버릴 거 같은데, 만병통치 불로장생이 이토록 감동을 주니 약을 향해 지금 손들지 않으면 북적이는 틈에서 소외될 거 같고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안 올 거 같으니까 거금이라도 지를 만하잖아? 아직 카드 한도가 남았고 36개월 무이자 할부도 된다니 괜찮은 흥정이잖아? 약장수를 심으면 약 나무가 자라고 약이 주렁주렁 열리는 상상도 해봤지만 어쨌든 저 잘 생긴 약장수를 남겨놓고 나만 혼자 블랙홀에서 빠져나올 수도 없었어 그러니까 나는 부지런히 ..

♧...참한詩 2022.09.25

제6회 시산맥작품상-초당(草堂)두부가 오는 밤 /문성해

초당(草堂)두부가 오는 밤 문성해 옛날에는 생각도 못한 초당을 알아 서늘한 초당두부를 알아 동짓날 밤 선연한 선지를 썰 듯 썩둑썩둑 그것을 썰면 어느새 등 뒤로는 그 옛날 초당(草堂) 선생이 난을 칠 때면 뒷목을 서늘케 하며 일어서던 대숲이 서고 대숲을 흉흉히 돌아나가던 된바람이 서고 그럴 때면 나는 초당 선생이 밀지(密旨)를 들려 보낸 이제 갓 생리 시작한 삼베속곳 일자무식의 여복(女卜)이 된다 때마침 개기월식하는 하늘 분위기로 가슴에 꼬깃꼬깃 품은 종잇장과 비린 열여섯 해를 바꿀 수도 있을 것 같고 저잣거리의 육두문자도 오늘 밤만큼은 들리지 않는다 하고 밤 종일 붙어 다니는 개새끼들에게도 한눈팔지 않고 다만 초당 선생 정지 간에서 저고리 가슴께가 노랗게 번진 유모가 밤마다 쑹덩쑹덩 썰어 먹던 그것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