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 / 오규원 고요 오규원 라일락 나무 밑에는 라일락 나무의 고요가 있다 바람이 나무 밑에서 그림자를 흔들어도 고요는 고요하다 비비추 밑에는 비비추의 고요가 쌓여 있고 때죽나무 밑에는 개미들이 줄을 지어 때죽나무의 고요를 밟으며 가고 있다 창 앞의 장미 한 송이는 위의 고요에서 아래의 고요로 지고 있다 시집『두두』,문학과 지성사(2008년) ♧...참한詩 2021.10.24
사진 / 이승훈 사진 이승훈 허름한 처마 아래서 밤 열두 시에 나는 죽어, 나는 가을 비에 젖어 펄럭이는 질환이 되고 한없이 깊은 층계를 굴러 떨어지는 곤충의 눈에 비친 암흑이 된다. 두려운 칼자욱이 된다. ♧...참한詩 2021.10.24
나의 하나님 / 김춘수 나의 하나님 김춘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여리디 여린 순결이다.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두빛 바람이다. ♧...참한詩 2021.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