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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 넝쿨 / 황동규

담쟁이 넝쿨 황동규 건물 벽에 그어지는 균열은 건물의 상처겠지. 서달산 가는 길에 만나곤 하던 낡기 시작한 빌라 콘크리트 벽에 번갯불 형국으로 조금씩 벌어지던 틈새, 지난해부터 검푸른 잎들이 기어올라 가려주기 시작했다. 포도과 담쟁이 넝쿨. 남의 상처 가리는 삶은 남는 삶이겠지. 색깔도 보는 마음 편케 검푸르네. 오늘은 까마중 같은 귀여운 열매까지 달고 있군. 걸음 멈췄다. 검푸른 잎들 속에서 잎 하나가 빨갛게 불타고 있었지. 벽의 균열 가리는 검푸름 일색 잎들 속에 저렇게 혼자 불타는 놈도 있었군. 잎 하나가 건물 벽을 온통 설레게 하는구나. 걸음 떼기 전, 이 세상 사는 동안 어떤 건물의 벽이 마음의 끈을 이처럼 세차게 당겼지?

♧...참한詩 2021.04.28

어느 봄날

어느 봄날 개와 개나리 사이 무슨 연분이 있을 리도 만무하고 아파트 담벼락 활짝 핀 개나리 앞에서 산책 나온 개 두 마리 난리를 치네요 멀건 대낮 입마개한 사람들은 벚꽃 벗고-옷 그러며 지나가는데 누런 수캐는 혀를 빼물고 꽁무니 빼는 암캐 등에 확 올라탑니다 개 나리, 난 나리 쏙 빼닮은 개를 낳고 싶어요 코로나로 들끓는 이 난리 통에도, 참 사랑은 싹이 트네요 개 난리 통에 개나리는 참 난감했겠습니다 이 화창한 봄날 성이 차지 않은 게 어디 걔들뿐이었겠습니까 마는 사정없이 떠나는 봄도 어지간히 다급했나 봅니다 (2021 문경문학 16호)

♧...발표작 2021.04.13

살맛나는 세상

살맛나는 세상 김욱진 얼마 전 정년퇴직을 했거든요 고향 친구들 간간이 전화 와서 요즘 백수 된 기분 어떠냐고 물으면 살맛이 난다 그러지요 그래도 꼬치꼬치 물으면 진담 반 농담 반 봄 꼬치꼬치 흐드러지게 피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한참 너스레를 떨지요 아침 먹고 동네 한 바퀴 돌다 보면 개나리 목련 벚꽃 죽 나와 서서 인사하는 거 다 받아줘야지요 이름 모를 새들 날아와서 노래 부르는 거 다 들어줘야지요 멀리서 친정집처럼 찾아온 벌 나비들 가족사진 한 장씩 찍어둬야지요 눈 퀭한 길고양이들 새우깡이라도 한낱 던져줘야지요 그러고 노인정 앞 툇마루 둘러앉아 윷놀이하는 할머니들 윷말 다 써줘야지요 도 앞에 개 나온 할머니 인상이 죽을 맛인데 멍멍 짖고 지나가는 개 멍하니 쳐다보는 척하며 윷말을 은근슬쩍 윷에다..

♧...발표작 2021.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