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꽃/이홍섭 오동꽃 이홍섭 오동꽃이 왔다 텅 빈 눈 속에 이 세상 울음을 다 듣는다는 관음보살처럼 그 슬픈 천 개의 손처럼 가지마다 촛대를 받치고 섰는 오동나무 오랜 시간 이 신전 밑을 지나갔지만 한 번도 불을 붙인 적 없었으니 사방으로 날아가는 장작처럼 그 덧없는 도끼질처럼 나는 바다로, 깊은 산속으로.. ♧...참한詩 2011.05.25
돌멩이 하나/김남주 돌멩이 하나 김남주 하늘과 땅 사이에 바람 한점 없고 답답하여라 숨이 막히고 가슴이 미어지던 날 친구와 나 제방을 걸으며 돌멩이 하나 되고자 했다 강물 위에 파문 하나 자그맣게 내고 이내 가라앉고 말 그런 돌멩이 하나 날 저물어 캄캄한 밤 친구와 나 밤길을 걸으며 불씨 하나 되고자 했다 풀밭.. ♧...참한詩 2011.05.19
치워라, 꽃!/이안 치워라, 꽃! 이안 식전 산책 마치고 돌아오다가 칡잎과 찔레 가지에 친 거미줄을 보았는데요 그게 참 예술입디다 들고 있던 칡꽃 하나 아나 받아라, 향(香)이 죽인다 던져주었더니만 칡잎 뒤에 숨어 있던 쥔 양반 조르륵 내려와 보곤 다짜고짜 이런 시벌헐, 시벌헐 둘레를 단박에 오려내어 톡! 떨어뜨리.. ♧...참한詩 2011.05.19
이상하다/최종득 이상하다 최종득 외할머니가 고사리와 두릅을 엄마한테 슬며시 건넵니다. "가서 나물 해 먹어라. 조금이라서 미안타." "만날 다리 아프다면서 산에는 뭐하러 가요. 내가 엄마 때문에 못살아요." 늘 주면서도 외할머니는 미안해하고 늘 받으면서도 엄마는 큰소리칩니다. ♧...참한詩 2011.05.19
만약/함기석 만약 함기석 만약 지상의 눈송이가 모두 벌레로 변한다면 만약 도시 상공의 구름이 모두 바윗덩어리로 변한다면 만약 너의 혀가 끝없이 늘어나 두 줄기 레일이 된다면 만약 너의 방이 거대한 콘크리트 괴물의 귓속이라면 만약 네가 걸을 때 빌딩들이 나무들이 둥둥 떠오른다면 만약 네 시의 글자들이 .. ♧...참한詩 2011.05.19
나와 나 사이/문정희 나와 나 사이 문정희 나와 나 사이 시를 버리고 흐르는 구름을 끼워 놓는다 눈부신 양들의 행렬을 시는 때로 욕망의 무게를 지니지만 구름은 만개한 공허 흩어지고 말면 그뿐인 나와 나 사이 날카로운 터럭을 밀어 버린다 앵무새 능구렁이 삼류 배우를 밀어 버린다 이끼가 낄 때까지 입을 열지 않는 검.. ♧...참한詩 2011.05.19
그 놋숟가락/최두석 그 놋숟가락 최두석 그 놋숟가락 잊을 수 없네 귀한 손님이 오면 내놓던 짚수세미로 기왓가루 문질러 닦아 얼굴도 얼비치던 놋숟가락 사촌누님 시집가기 전 마지막 생일날 갓 벙근 꽃봉오리 같던 단짝친구들 부르고 내가 좋아하던 금례 누님도 왔지 그때 나는 초등학교 졸업반 누님들과 함께 뒷산에 .. ♧...참한詩 2011.05.19
할머니 입/윤동재 할머니 입 윤동재 할머니를 보면 참 우스워요 세 살배기 내 동생에게 숟가락으로 밥을 떠 넣어 주실 때마다 할머니도 아-- 아-- 입을 크게 벌리지요. 할머니 입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고. 할머니를 보면 참 우스워요. 세 살배기 내 동생이 밥 한 숟가락 입에 넣고 오물오물거릴 때마다 할머니도 내 동생을.. ♧...참한詩 2011.05.19
사방과 그림자/오규원 사방과 그림자 오규원 장미를 땅에 심었다 순간 장미를 가운데 두고 사방이 생겼다 그 사방으로 길이 오고 숨긴 물을 몸 밖으로 내놓은 흙 위로 물보다 진한 그들의 그림자가 덮쳤다 그림자는 그러나 길이 오는 사방을 지우지는 않았다 ♧...참한詩 2011.05.19
마침표를 뽑다/이덕규 마침표를 뽑다 이덕규 살아 있는 문장 끝에 박힌 마침표처럼 흔들거리는 개말뚝을 다시 고쳐 박자고 무심코 쑥 뽑았는데, 아뿔싸 잡을 새도 없이 어떤 넘치는 힘이 무거운 쇠사슬을 끌며 멀리 동구 밖으로 뛰쳐나가는 경쾌한 소리를 듣는다 일생을 단 한 줄로 요약한 단문 끝에 말뚝처럼 박힌 뒷산 무.. ♧...참한詩 2011.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