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천정/이성선 고향의 천정 이성선 밭둑에서 나는 바람과 놀고 할머니는 메밀밭에서 메밀을 꺾고 계셨습니다. 늦여름의 하늘빛이 메밀꽃 위에 빛나고 메밀꽃 사이사이로 할머니는 가끔 나와 바람의 장난을 살피시었습니다. 해마다 밭둑에서 자라고 아주 커서도 덜 자란 나는 늘 그러했습니다만 할머니는 저승으로 .. ♧...참한詩 2011.06.15
다리 위에서/이용악 다리 위에서 이용악 바람이 거센 밤이면 몇 번이고 꺼지는 네모난 장명등을 궤짝 밟고 서서 몇 번이고 새로 밝힐 때 누나는 별 많은 밤이 되어 무섭다고 했다 국수집 찾아가는 다리 위에서 문득 그리워지는 누나도 나도 어려선 국수집 아이 단오도 설도 아닌 풀벌레 우는 가을철 단 하루 아버지의 제삿.. ♧...참한詩 2011.06.15
다시 목련/김광균 다시 목련 김광균 사월이 오면 목련은 왜 옛마당을 찾아와 피는 것일까 어머님 가신 지 스물 네 해 무던히 오랜 세월이 흘러갔지만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고 잔디잎이 눈을 뜰 때면 어머님은 내 옆에 돌아와 서셔서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보신다 하루 아침엔 날이 흐리고 하늘에서 서러운 비가 나리더니.. ♧...참한詩 2011.06.15
규원가/허난설헌 규원가 허난설헌 찰하리 잠을 들어 꿈의나 보려 하니 바람의 디난 잎과 풀 속에 우는 즘생 무스 일 원수로서 잠조차 깨오난다 천상의 견우직녀 은하수 막혀서도 칠월칠석 일년일도 실기치 아니거든 우리 님 가신 후는 무슨 약수 가렷관듸 오거나 가거나 소식조차 끄쳣는고 난간의 비겨 셔서 님 가신 .. ♧...참한詩 2011.06.15
4월의 가로수/김광규 4월의 가로수 김광규 머리는 이미 오래 전에 잘렸다 전깃줄에 닿지 않도록 올해는 팔다리까지 잘려 봄바람 불어도 움직일 수 없고 토르소처럼 몸통만 남아 숨막히게 답답하다 라일락 향기 짙어지면 지금도 그날의 기억 되살아나는데 늘어진 가지들 모두 잘린 채 줄지어 늘어서 있는 길가의 수양버들 .. ♧...참한詩 2011.06.15
생명의 서/유치환 생명의 서 유치환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리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 ♧...참한詩 2011.06.15
혀/송재학 혀 송재학 입술 안쪽 유일한 짐승인 혀는 눈도 손발도 없이 온몸으로 꼼지락거리는데 그 몸 어딘가 꿈틀꿈틀 천 개의 활주로가 있다는데 그 많은 공지 위로 수생의 버짐꽃이 피고 진다는데 혓바닥 빌려 한켠에서 쟁기질한다는 이야기는 또 무어냐 혓바닥에 자주 돋는 뾰족한 가시 울타리 잘라내고 단.. ♧...참한詩 2011.06.14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장정일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장정일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 ♧...참한詩 2011.06.01
[스크랩] 바퀴/문인수 바퀴 문인수 말복 날 수륜리(水輪里) 유원지엘 갔다. 우리는 계곡물 콸콸콸거리는 어느 식당 숲 그늘에 자릴 잡았다. 물 가 여기 저기 네모난 살평상을 박아 놓고, 그러니까 급류의 속도를 최대한 붙잡아놓은 집일까. 하지만 유수 같은 세월, 희끗희끗 달아나는 물살이다. 옆 자리 살평상엔 중늙은이 아.. ♧...참한詩 2011.05.28
오동꽃/이홍섭 오동꽃 이홍섭 오동꽃이 왔다 텅 빈 눈 속에 이 세상 울음을 다 듣는다는 관음보살처럼 그 슬픈 천 개의 손처럼 가지마다 촛대를 받치고 섰는 오동나무 오랜 시간 이 신전 밑을 지나갔지만 한 번도 불을 붙인 적 없었으니 사방으로 날아가는 장작처럼 그 덧없는 도끼질처럼 나는 바다로, 깊은 산속으로.. ♧...참한詩 2011.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