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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제3회 <구지가문학상> 수상작 / 박형권

소금을 뿌리고 후추를 뿌리는 사이 박형권 ​ ​고등어 한 손 사서 한 마리는 굽고 한 마리는 찌개를 끓이는 게 좋을 것 같다 바다로 씻어낸 무늬가 푸를 때 침묵으로 말하는 통통한 몸을 갈라 복장을 꺼내고 무구정광다라니경을 생각해 보자 당장 읽을 수 없다면 비늘을 벗겨보자 지느러미를 쳐내 보자 부엌방의 전등 빛으로 읽어 내려가자 마지막 소절에서는 바다의 일몰을 불러내어 몸으로 건설한 저녁 한 끼를 불그스름하게 경배하자 생선 구워 밥상에 올리면 그곳이 세계의 중심 혀로 말씀을 삼키기도 한다 오늘도 피 흐르는 가을, 단풍을 뿌리며 단풍에 베인다 그리하여 단풍은 피보다 비리다 이 가을도 오래 가지 않을 터 몇 마리 더 사서 따로 남는 추억은 냉동실에 넣는다 생선 한 손은 왜 두 마리이어야 하는지 한 손은 들고 ..

새의 집 / 이규리

새의 집 이규리 귓속에 요란하게 비가 쏟아졌다 전정기관에 비가 집을 짓는다 가재도구가 흔들리고 새가 둥지를 틀었나 불빛이 들여다본다 어지러울 수 있다고 의사는 말했다 그렇다고 웃음을 거두라는 말은 아니라고도 했다 뭐, 너무 반듯이 걸으려고 하지 마세요 벽을 의지하고 걷다 보면 벽을 이해하지 않을까요 비유법을 쓰는 의사를 신뢰하기로 하면서 벽을 믿어보았다 내가 밀렸다 천장에 동그라미들이 흩어지고 모이고 사라지는 동안 회전목마가 돌고 아버지는 오지 않고 치마가 짧아지고 있었다 여기가 우듬지구나 우듬지는 새의 집이구나 만질 수 없는 소리들이 가득 들어있구나 고개를 돌릴 때마다 특히 어지러웠는데 눈보라가 날리고 그때 아주 잠깐 피안이 있었고 눈이 베이고 황홀이야 그게 내가 낫기를 바라지 않는 이유였다 나는 새의..

♧...참한詩 2023.06.24

김욱진 시인, 2023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 선정(시 7편)

AI 김욱진 저 아이 요즘 뭐든지 물으면 척척 대답을 다해준다고? 에이, 세상에 그런 아이가 어디 있어 태어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말로만 듣던 AI, 딴 세상 얘기처럼 들리더니만 어느새 그 아이가 이렇게 많이 컸어 챗GPT라고 부른다면서 그래, 맞아 조무래기라고 얕보지 말게 지난 번 이세돌 하고 바둑 둬서 이겼다는 그 아이야 그럼, 돌아이구만 이게 어디 사람 사는 세상인가 야, 이 친구야 지금, 여기 농담할 상황 아닐세 머잖아 자동차 자율주행 운전도 저 아이가 하고 자네가 몇날며칠 끙끙거려 짓는다는 시 한 편 저 아이는 몇 초 만에 후딱 써버린다네 시면 시, 소설이면 소설 심지어 나의 일기까지도 줄줄 다 써준다네 짧다 그러면 금방 늘여주고 좀 길다 그러면 눈치껏 줄여주고 “…해줘”“…알려줘” 하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