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731

오래된 기도 / 이문재

오래된 기도 이문재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참한詩 2023.02.21

소리의 전령 / 이진엽

소리의 전령 이진엽-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얇은 막(幕)이 있는 것인가 여름, 그것이 끝나가는 길목이 그러하다 무엇인가 작은 드릴로 구멍을 뚫는 듯한 소리 똘똘똘 똘똘똘 그 소리에 투명한 막이 찢어지고 한 계절이 바뀌는 소식이 개울물처럼 밀려든다 조그만 미물 하나가 가녀린 촉수로 시간의 벽을 뚫고 맨 먼저 우주의 섭리를 이끌고 오는 저 소리 천지는 무심한 침묵 중에서도 이렇듯 어김없이 소리의 전령을 보내며 세계의 귀 먹은 밤을 열어 준다 귀뚜라미, 그 소리로

♧...참한詩 2023.02.17

노래의 눈썹 / 장옥관

노래의 눈썹 장옥관 새의 발가락보다 더 가난한 게 어디 있으랴 지푸라기보다 더 가는 발가락 햇살 움켜쥐고 나뭇가지에 얹혀 있다 나무의 눈썹이 되어 나무의 얼굴을 완성하고 있다 노래의 눈썹, 노래로 완성하는 새의 있음 배고픈 오후, 허기 속으로 새는 날아가고 가난하여 맑아지는 하늘 가는 발가락 감추고 날아간 새의 자취 좇으며 내 눈동자는 새의 메아리로 번져나간다

♧...참한詩 2023.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