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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퇴고 / 길상호

저녁의 퇴고 길상호 앉은뱅이 밥상을 펴고 시 한 편 다듬는 저녁, 햇살이 길게 목을 빼고 와 겸상으로 앉는다 젓가락도 없이 시 한 줄을 쭈욱, 뽑아들더니 허겁지겁 씹기 시작한다 너무 딱딱한 단어 몇 개 가시처럼 발라내놓고 익지 않은 수사들은 퉤퉤 뱉어내놓고, 넘길 게 하나 없었는지 잇자국 가득한 언어들 수북이 밥상 위에 쌓인다 노을보다 더 벌게져서 얼른 창을 닫고 돌아오니 시는 시대로 나는 나대로 발목을 잃은 앉은뱅이, 먹을수록 허기진 밥상은 잠시 물려놓기로 한다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모르는 척》 《눈의 심장을 받았네》 천상병詩문학상 수상...

♧...참한詩 2021.07.22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물 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참한詩 2021.07.04

밥그릇 / 조향순

밥그릇 조향순 바깥에 사는 고양이의 밥그릇을 채우느라 나는 늘 바쁩니다 아침 먹으로 왔는데 밥그릇이 비었잖아 실컷 놀고 출출한데 밥그릇이 비었잖아 밤참 먹으로 왔더니 밥그릇이 비었잖아 이럴까봐 아침에도 낮에도 밤중에도 밥그릇을 채웁니다 빈 밥그릇 앞에서 떨어뜨릴 꽃씨 같은 작은 눈물, 생각만 해도 아! 빈 밥그릇 앞에서 떨어지는 세상의 모든 눈물, 생각만 해도 아!아!

♧...참한詩 2021.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