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732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 이성복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이성복 진해에서 훈련병 시절 외곽 초소 옆 개울물에 흰 밥알이 떠내려왔다 나는 엠원 소총을 내려놓고 옹달샘 물을 마시는 노루처럼 밥알을 건져 먹었다 물론 배도 고팠겠지만 밥알을 건져 먹는 내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나는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생에 복수하고 싶었다 매점 앞에서 보초 설 때는, 단팥빵 맛이 조금만 이상해도 바닥에 던지고 가는 녀석들이 있었다 달려드는 중대장의 셰퍼드를 개머리판으로 위협하고, 나는 흙 묻은 빵을 오래 씹었다 비참하고 싶었다 비참하고 싶은 나를 바라보고 싶었다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또 일병 달고 구축함 탈 때, 내게 친형처럼 잘해주던 서울 출신 중사가 자기 군화에 미역국을 쏟았다고, 비 오는 비행 갑판에 끌고 올라가 발길질을 했다 처..

♧...참한詩 2021.06.18

반대말 / 김소연

반대말 김소연 ​ 컵처럼 사는 법에 골몰한다 컵에게는 반대말이 없다 설거지를 하고서 잠시 엎어 놓을 뿐 ​ 모자의 반대말은 알 필요가 없다 모자를 쓰고 외출을 할 뿐이다 모자를 쓰고 집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게 가끔 궁금해지긴 하겠지만 ​ 눈동자 손길 입술, 너를 표현하는 너의 것에도 반대말은 없다 마침내 끝끝내 비로소, 이다지 애처로운 부사들에도 반대말은 없다 ​ 나를 어른이라고 부를 때 나를 여자라고 부를 때 반대말이 시소처럼 한쪽에서 솟구치려는 걸 지그시 눌러주어야만 한다 나를 시인이라고 부를 때에 나의 반대말들은 무용해진다 ​ 도시에서 변두리의 반대쪽을 알아채기 시작했을 때 지구에서 변두리가 어딘지 궁금한 적이 있었다 뱅글뱅글 지구의를 돌리며 ​ 이제 컵처럼 사는 법이 거의 완성되어간다 ​ 우..

♧...참한詩 2021.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