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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주신 선물 / 권영하

선생님이 주신 선물 권영하 선생님이 벌 대신 수정테이프를 주셨어요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고 수정테이프에는 하얀 길이 감겨있었어요 펜이 길을 잘못 가면 기다리고 있다가 달려 나왔어요 지우개로 지워지지 않는 길도 공책에 잘못 쓴 발자국도 뚜벅뚜벅 걸어 나와 덮어주었어요 참고 있다가 잘못을 살며시 덮어주었어요 다시 걸어갈 수 있도록 새 길을 놓아주었어요 며칠 후, 친구와 또 말다툼을 했는데 선생님은 어깨만 토닥토닥 두드려 주셨어요 꾸중 대신 또 수정테이프를 주셨어요

♧...참한詩 2021.05.23

하얀 저수지 / 문성해

하얀 저수지 문성해 저수지가 얼고 그 위로 눈이 왔다 맨얼음 위로는 감히 올라가지 않더니 땅과 물의 경계가 없어지자 사람들이 겁도 없이 그 위로 걸어들어간다 얼음판 가운데 서 있으니 내가 오래전에 이 저수지에 빠져 죽은 사람 같다 내 발밑으로 사람을 뜯어 먹고 산다는 잉어 한마리 지나가는가 머리카락이 키를 넘기게 자란 그 여자가 지나가는가 클클거리는 얼음판 밑이 지금은 아우성이고 폭풍 속 같은 데고 얼음판 위는 물속처럼 적막하다 퍼런 물살 한 조각 신발에 묻히고 걸어나오면 잉여된 목숨을 사는 듯 피가 훈훈히 데워지고 신발코를 하얗게 밝힌 채 사람들이 집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참한詩 2021.05.20

노래 / 이경림

노래 이경림 나 세상에 안 가본 길 많아 몸이 아픕니다 그 길들 자꾸 내 몸에 휘감기어 숨이 막힙니다 문득 눈떠 보면 낯선 길 만발하고 어질머리처럼 세상 도는데 나 아직 안 해본 짓거리 너무 많아 눈이 어둡습니다 해지면 남몰래 이야기를 만드는 불빛 뻔한 집들 메밀꽃처럼 피어나는 도시의 불빛들 아우트라인만 너무 환한 저 유곽들 나 그것들에 눈멀어 자꾸 몸이 상합니다 시도 때 없이 우우우 관절이 일어납니다 나 아직 안 울어본 울음 많아 목젖이 붓습니다 꺼이꺼이 울 일 아직도 많아 미리 목젖이 붓습니다 아 그런 날은 내 몸이 화로입니다

♧...참한詩 2021.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