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2 10

산낙지와 하룻밤 / 김욱진

산낙지와 하룻밤 김욱진 나 어릴 적우등상 받아왔다고아버지는 시오리 길 장에 가서장작 한 짐 판 돈으로산낙지 한 마리지겟머리 걸머지고 오셨다그날 저녁그 녀석을 산 채로 듬성듬성 썰어접시 위에다 올려놓으니낙지 수십 마리가 꼬물꼬물거렸다난생처음 바다를 떠나온 낙지는참, 어리둥절했겠다바다에 사는 줄도 모르고 산낙지는 정신없이 참, 기름장을 찍어 먹었다미끌미끌 파도가 출렁일 때마다멀미를 했다낙지는 내 입안이 갯벌인 줄 알고천장에 착 달라붙어 있다가목구멍 속으로 차츰차츰 기어들어 갔다낯선 숙소에서밤새 구불텅구불텅 온몸을 뒤척이다새벽녘 나랑 곤히 잠들었다 (2024 텃밭시학 연간집)

♧...발표작 2024.10.22

엄니처럼 / 김욱진

엄니처럼김욱진 앉았다 일어서니 빙 둘렸다방전이 된 건지유효 기간이 다 되어 가는 건지겨우 119 불러 병원 갔다다짜고짜 빈혈 검사해보자며피 한 대롱 뽑고간수치는 괜찮은데, 의사 선생 고개 갸우뚱갸우뚱입이 자주 마르고 체중이 좀 줄었습니다그럼, 정밀 당뇨 검사도 해봐야 된다며또 피 한 대롱 뽑고혹, 숨이 차다거나 몸이 가렵지는 않습니까이참에 콩팥 검사해보는 게 좋겠어요그러면서, 또 피 한 대롱 뽑고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피 한 사발 마셔도 시원찮을 판에피 세 대롱 야금야금 빼앗기고 나니나도 모르게암울한 세포가 스멀스멀 기어가는 거 같고허수아비가 되어버린 기분도 들고이러다 진짜 쓰러지는 거 아닌가 싶다가도이게 다 유전이라니, 얼마나 다행인지핏줄 따라 죽 거슬러 올라가 보면, 나무의 유전자 정보가 깨알같이 드..

♧...발표작 2024.10.22

자격증 시대 / 김욱진

자격증 시대김욱진 요즘 자격증 하나로는 왠지 불안하다눈앞에 날파리가 날아다니고부터나는 온종일 칭얼대는 그 녀석들 밥 먹이고뒤치다꺼리하다 보면하루해가 훌쩍 다 지나간다그러다 밤이 되면아무 일도 없었듯 곤히 잠들어버리는 녀석들개중엔 오줌 마렵다고 깨서 보채는 녀석도 있고엎치락뒤치락 잠꼬대하듯밤새 돌아다니는 녀석도 있다그냥 모른 척할 수도 없고젖먹이 달래듯 살살 달래다 보면난데없이 귓속 어느 한 모퉁이서 매미들 요란하게 울어댄다벙어리 냉가슴 앓듯 맴맴 같이 따라 울다새벽녘에야 겨우 잠재우고잠시 눈 붙이려고 누웠다 보면저 멀리 귀뚜리 소리도 들린다밤낮이 이래 시끄러워서야, 우째 살겠노 철없이 울어대는 요 녀석들 죽 데리고담날 아침 용타는 안이비인후과 찾아갔더니비문증에다 이명증까지 노치원 자격증은 이게 기본이라 ..

♧...발표작 2024.10.22

운주사 와불 / 김욱진

운주사 와불김욱진 천불 천탑 불사 중 쓰러져 누워계신다고, 천년을물어물어 천불산 운주사 찾아갔다무슨 꾀병 부리실 리는 만무하고얼마나 속 천불이 나셨을까산새들 간간이 날아와 팔다리 주물러드리고 있었다어떤 새는 천수경 외듯 중얼중얼어느 새는 부처 입에다 공양 올리듯물똥 찔끔 싸고 어느새 훨훨와불이시여, 이 불사 어느 천년에 다 하시려고이렇게 누워만 계십니까허허, 참새가 방앗간 앞을 그냥 지나갈 수 있겠는가자네가 누워 있다니 오늘은 누워 있는 그 자리서 천불 천탑 불사해야겠네조금 전 자네 입에서 뱉은 천년이 내 귀퉁이로천둥번개처럼 지나갔지너와 나 둘 아닌 그 자리누구의 천년이 머물다 갔는가와, 불이다한 소식 전해들은 사람들 허겁지겁 찾아와어떤 이는 텅 빈 손바닥에 천불이란 천불 다 내려놓고또 어떤 이는 머리맡..

♧...발표작 2024.10.22

장마를 장미라 부를 때 / 김욱진

장마를 장미라 부를 때김욱진 지붕에서 비가 샜습니다한밤중 쏟아지는 빗소리에 말도 샜습니다, 할매는그놈의 장미, 참 오래도 간다 하시면서그냥 방바닥에다고무다라이 세숫대야 냄비 줄줄이 받쳐놓고밤새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 한가득씩 받았습니다물 부자 된 담날 아침그 물로 나는 세수하고 머리 감고엄마는 설거지하고 빨래도 하고할매는 장독대 위에다 정화수 한 그릇 떠놓고 소지 한 장 불 사르며손 귀한 우리 집 자손 번성하고식구들 그저 몸이나 성케 해달라고천지사방 삼신 할매한테 빌었습니다그 기도발이 먹혔던지시집간 막내 고모는 떡두꺼비 같은 아들 낳고풍으로 쓰러진 할배는 죽을 고비 넘기시고포도알처럼 송알송알 맺힌 물방울 천장 스며들어 장밋빛으로 불그스레 물들었습니다장마가 그려놓은 장미 한 송이내 가슴 속 천장엔 아직도어릴..

♧...발표작 2024.10.22

늦가을 시화전 / 김욱진

늦가을 시화전김욱진 얼마 전, 엄니 살던 흙집에서 시화전을 열었다 틈틈이 주워 모은 기왓장에다 연꽃 그림 그리고 시 몇 구절 적어 마당 구석구석 세워뒀다 이게, 시처럼 그림처럼 보였던지 오가는 개미들은 줄지어 서서 한참 쳐다보다 가고 동네 길고양이들은 재능 기부하듯 야옹야옹 자작시 낭송도 하고, 그 소문 듣고 찾아온 벌 나비는 시향에 흠뻑 젖어 훨훨 춤도 추고 시화가 뭔 줄도 모르는 거미들은 처마 밑 허공에다 습작하듯 그림 같은 시 줄줄 걸쳐놓고 이 줄 저 줄 밑줄 그어가며 붓질하느라 분주하고 어디선가 귀티 나는 새도 한 마리 날아와 훗훗, 하며 시를 읊었다   비슬산 문필봉이 나를 내려다보며 그냥 붓 가는 대로 그리고 쓴 것 그게 다 그림이고 시라는 말씀 한마디 후투티처럼 훅, 던지고 갔다  (202..

♧...발표작 2024.10.22

선사 법문 / 김욱진

선사 법문-이만翁                      대구시 달서구 진천동에 가면2만 년 전 살던 고인돌사람 한 분 모로 누워계신다얼마 전 코로나 예방주사도 맞고입마개도 하고 있더니만오늘은 대한민국 0.72 라는 명패 달고눈물을 흘리고 있네헐, 저게 뭐지0.72가 이름일 리는 만무하고시력이 0.72란 말인가그럼, 안경을 씌워뒀을 텐데 것도 아니고차 쌩쌩 달리는 길섶에서환생한 고인돌이 눈물까지 보이고아, 이는 분명 무슨 곡절이 있을 터언저리 선사시대 사람들 만나 여쭤봐야지죽음이 살아 숨 쉬는 골목 한 모퉁이무덤 앞에 서있는 돌이 눈에 띈다선돌마다 새겨진 그림, 자는 또 뭐지다짜고짜 팻말에 적힌 자한테 물어보니이 암각화 속엔 다산의 의미가 숨겨져 있었네그래, 맞아요즘 사람들 아이 낳지 않는다는 소식 듣고속..

카테고리 없음 2024.10.22

공짜로 / 김욱진

공짜로김욱진 나, 이 세상 태어나보니공기도 공짜로 마시고햇볕도 공짜로 쬐고달님별님도 공짜로 보고땅도 공짜로 걷고꽃향기도 공짜로 맡고새소리도 공짜로 듣고생각도 공짜로 하고꿈도 공짜로 꾸고나도 공짜로 먹고이젠 이도 공짜로 심고지하철도 공짜로 타고머잖아 하늘나라도 공짜로 가고허 참, 공짜를 空자로 읽고 보니공짜로 머문 지금, 여기가진짜 나의 우주일세 그려 (2024 시인부락 겨울호)

♧...발표작 2024.10.22

발이 하는 말 / 김욱진

발이 하는 말 아, 어디쯤일까길을 걷다폐휴지 한 리어카 싣고언덕길 오르는 맨발을 보았다, 나는들었다, 발이 하는 말을발가락은 바짝 오므리고 뒤꿈치는 쳐들고그래도 뒤로 밀려 내려가거든헛발질하듯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혓바닥 죽 빼물고 땅바닥 내려다봐써레질하는 소처럼발바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바닥과 바닥은 통하는 법이야그래, 맞아둘이 하나 된 바닥은 바닥 아닌 바닥이지손바닥처럼 그냥 가닿는 대로가닿은 그곳이 바닥이니까여기, 지금, 나는바닥 아닌 바닥에서보이지 않는 발바닥을 보았고바닥없는 바닥아슬아슬 가닿은 발바닥이 내쉬고 들이쉬는 숨소리 들었다비 오듯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 사이로리어카 바퀴가 미끄러져 내려갈 적마다발바닥은 시험에 들었다땀 한 방울 닿았을 뿐인데그 바닥은 난생처음 가닿은 바닥발가락과 발뒤꿈치는..

♧...발표작 2024.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