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등 연등 봄눈 활짝 뜨고 보니 지난 가을 은행 알 빼곡 매달렸던 자리 연등이 줄지어 달렸다 등에 분홍색 녹색 연꽃이 피었다 남의 등에 꽃 피우고 사는 곳 한 生 머물러 봤으면 아니, 그 법당에서 등 공양 인연 한 번이라도 지었으면 수 겁의 천생연분이겠다 연꽃과 동거 중인 은행 이파리 파.. ♧...참, 조용한 혁명 2016.11.09
줄탁啐啄 줄탁啐啄 나는 씨줄과 날줄 사이 태어난 줄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이 줄 가서 기웃, 저 줄 가서 기웃 줄 괴고 널뛰며 돌아다니다 배배 꼬인 줄 하나, 툭 터져 길바닥 축 늘어져 누웠다 어미닭이 울었다, 홰치며 하늘 부둥켜안고 울었다 묵은 빚 독촉하듯 줄 잡아당기는 하늘 식은 밥 .. ♧...참, 조용한 혁명 2016.11.09
하루살이 하루살이 주인 노릇할 생각도 종노릇할 시간도 없는 하루살이의 하루 가슴 벅찬 하루다 한 생 깨어 살다가는 하루 그 하루가 나의 하루다 곶감 빼먹듯 날 빼먹고 간 하루 우연찮게 와서 날 헐고 간 그 하루가 나의 전생이다 내생은 내일보다 더 가깝다 기적 같은 찰나刹那 허투루 얕보지 .. ♧...참, 조용한 혁명 2016.11.09
모처럼 모처럼 추어탕에 밥 말아먹다 혀를 깨물었다 모처럼 걸려든 미꾸라지 잽싸게 그물망 빠져나가고 방생하며 돌아다니는 혓바닥만 물컹 씹어버렸다 입천장 착 달라붙은 미꾸라지 한 마리 내 피까지 질금질금 빨아먹으며 면벽 수행 중이다 겁 많기로 소문난 그놈 혼자인 척하면서 온갖 잡동.. ♧...참, 조용한 혁명 2016.11.09
숨바꼭질 숨바꼭질 어느 봄날 오후 앞 못 보는 스님 한 분, 흰 지팡이 짚고 차도와 인도 사이 몇 차례 오가다 간신히 보도블록 위로 올라서더니 술래처럼 손 내밀며 헛손질을 한다 닿을 듯 말듯 곁눈질하며 지나가는 사람들 발자국 소리 따라가다 허탕치고 돌아서서 옷깃 스치는 소리에 귀 기울이.. ♧...참, 조용한 혁명 2016.11.09
진오 대선사 진오* 대선사 돌아가신 부처님 생각만 하면 욕심 버리라는 말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수도암 법당 들어서면 욕심 한 덩어리 푹 도려내 부처님 드리고 참다운 공양구인 양 두 손 척 벌린다 그러면 부처님은 어물쩍 숨겨버린 내 욕심 마저 손바닥에다 올려놓고 되돌려줄듯 말듯 빙시레 웃으.. ♧...참, 조용한 혁명 2016.11.09
나무, 의두疑頭 나무, 의두疑頭 등 돌리고 앉은 도반 여럿 궁리 끝에 앞서가는 등이 뒤따라오는 등 업고 S자 걸음으로 등을 오른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뗄 적마다 혹 불룩불룩 튀어나온다 나무가 묻는다 저 혹은 누구의 혹이요? 풀리지 않는 의혹 주장자 삼아 짚고 등성이 한 구비 한 구비 오르는 등 나무.. ♧...참, 조용한 혁명 2016.11.09
시심마 시심마 목월 생가로 가을 소풍을 갔다 시비 앞에서 눈도장 찍고 보물찾기를 했다 이참에 한 밑천 잡아볼 요량으로 우물가 우물우물 지나 사랑채 아궁 속 샅샅이 들여다보고 있던 참 새 한 마리 방앗간 지나가며 중얼거린다 주인어른 시집 한 권 제대로 읽어본 적 없는 글 도둑놈아, 보물.. ♧...참, 조용한 혁명 2016.11.09
별 운명 별 운명 별똥 한 무더기 떨어지는 밤 똥 싸 붙이고 능청스럽게 엉덩이 치켜든 하늘 가랑이 새로 별똥 주워 먹던 개구쟁이 녀석 똥을 누가 와서 싹싹 핥아먹고 갔다 다음날 아침 똥개는 마당 한구석에서 별똥을 쌌다 할머니는 그 별똥 주워 담아 접붙인 감나무 입에다 햇살 짓이겨 넣어주.. ♧...참, 조용한 혁명 2016.11.09
법거량 법거량 비슬산 도성암 부처님 뵈러 가는 중, 염주 알 주렁주렁 목에 걸고 서있는 고욤나무보살 만나 합장 삼배하고 엎드려 고욤 한 알 한 알 주워 먹다 텅 빈 고요 다 삼킨 고욤 따먹고 싶어 나뭇가지 가까스로 손닿는 중, 포행하고 돌아가던 스님 한 분 내 손가락 훔쳐보며 누구요? 하고 .. ♧...참, 조용한 혁명 2016.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