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호흡/문태준 한 호흡 문태준 꽃이 피고 지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제 몸을 울려 꽃을 피워내고 피어난 꽃은 한번 더 울려 꽃잎을 떨어뜨려버리는 그 사이를 한 호흡이라 부르자 꽃나무에게도 뻘처럼 펼쳐진 허파가 있어 썰물이 왔다가 가버리는 한 호흡 바람에 차르르 키를 한번 흔들어 보이.. ♧...참한詩 2013.12.29
거룩한 식사/황지우 거룩한 식사 황지우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점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 ♧...참한詩 2013.12.29
가협시편/장석주 가협시편 장석주 지금도 해질녘이면 어디론가 숨고 싶어져. 시골다방 같은 데, 지평선이 보이는 딸기밭 같은 데, 그런 덴 없겠지? 이젠 없겠지? 시집 /붉디 붉은 호랑이/ 애지/ 2005 ♧...참한詩 2013.12.29
노숙 외 5편/김사인 노숙 김사인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 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 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참한詩 2013.12.29
꾸중/정호승 꾸중 정호승 엄마를 따라 산길을 가다가 무심코 솔잎을 한웅큼 뽑아 길에 뿌렸다. 그러자 엄마가 갑자기 화난 목소리로 호승아 하고 나를 부르더니 내 머리카락을 힘껏 잡아 당겼다. "누가 니 머리카락을 갑자기 뽑으면 안 아프겠나 말을 못 하지만 이 소나무가 얼마나 아프겠노" '예, 알.. ♧...참한詩 2013.12.29
누가 우는가 누가 우는가 나희덕 바람이 우는 건 아닐 것이다 이 폭우 속에서 미친 듯 우는 것이 바람은 아닐 것이다 번개가 창문을 때리는 순간 얼핏 드러났다가 끝내 완성되지 않는 얼굴, 이제 보니 한 뼘쯤 열려진 창 틈으로 누군가 필사적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것 같다 울음소리는 그 틈에서 요동.. ♧...참한詩 2013.12.29
오래된 땅/김기택 오래된 땅 김기택 살갗 밑으로 푸른 뿌리들 지나가는 것이 보입니다. 팔뚝에서 손등으로, 목에서 이마로 가지 치며 뻗어가고 있습니다. 거죽 밖으로 나오려는 굵은 뿌리를 살가죽이 간신히 누르며 덮은 곳도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눈알도 붉은 잔뿌리들이 움켜쥐고 있습니다. 살도 오래.. ♧...참한詩 2013.12.29
잔악한 숨결/정현종 잔악한 숨결 정현종 너무 맑은 바람은 갈증 너무 밝은 햇빛은 그리움 너무 투명한 것들의 보석의 광기 이 맑은 공기의 한숨 밝은 햇빛의 고독 모든 투명한 것들의 잔악한 숨결! ♧...참한詩 2013.12.29
종착역/이민우 종착역 이민우 서울역 대합실 한켠 쥐며느리 여자는 늘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다 겨울나무 삭은 몸뚱이 잔가지 차가운 흙더미 속으로 내리쳐 스며든 잔뿌리 맨발 누구 발에 맞춰 신 신겨 먼저 보내었나 비둘기 떼 수북히 앙가슴 깃털에 부리 씻고 여자의 깨진 발톱 발가락 아홉 개 모두 .. ♧...참한詩 2013.12.29
보성댁의 여름/고재종 보성댁의 여름 고재종 살 찔 틈 없이 살 마를 틈도 없이 닭장 밑에서 지샌 듯 새벽같이 일어나 솔가지 꺾어 밥 짓고 마당 쓸고 조반 차리기 전 빨래하고 텃밭 매고 아침은 먹는 둥 마는 둥 밭으로 나가 콩밭 깨밭 고추밭 미영밭 더터 골고지에 풀매기에 북주기에 물대기에 등짝이 죄 타도.. ♧...참한詩 2013.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