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울 수 없는 얼굴 /고정희 지울 수 없는 얼굴 고정희 냉정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얼음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불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부드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따뜻한 당신이라 .. ♧...참한詩 2013.12.29
정전이 된 날 저녁의 삽화/윤수천 정전이 된 날 저녁의 삽화 윤수천 정전으로 어둠에 갇힌 저녁 우리 가족은 각자의 방에서 나와 물에 모여 앉았다 오랜만에 자리를 함께 한 가족들의 얼굴이 어둠속에서 인화지의 얼굴처럼 흐릿하게 들어나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말들이 없었다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음을 우리는 그.. ♧...참한詩 2013.12.29
달빛 가난 /김재진 달빛 가난 김재진 지붕 위에도 담 위에도 널어놓고 거둬들이지 않은 멍석 위의 빨간 고추 위로도 달빛이 쏟아져 흥건하지만 아무도 길 위에 나와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부지, 달님은 왜 산꼭대기에 올라가 있나요?' '잠이 안 와서 그런 거지.' '잠도 안 자고 그럼 우린 어디로 가요?' '묻.. ♧...참한詩 2013.12.29
구두 뒷굽을 갈며/윤수천 구두 뒷굽을 갈며 윤수천 비스듬히 닳은 구두 뒷굽을 갈면서 내 인생도 저렇게 비스듬히 닳은 것을 깨닫는다 허,이럴수가! 내 딴에는 똑바로 걸어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다 뒤뚱거리지 않았으면 생기지도 않았을 저 흠집 등 뒤의 사람들은 나를 보고 웃었겠지 저 사람 좀 보게나, 저.. ♧...참한詩 2013.12.29
너와 나는 다르다 /임 영조 너와 나는 다르다 임영조 분명히 말해두지만 너는 나와 다르다 탐욕의 수사학에 능한 거미여 너는 어둡고 외진 곳에 그물을 치지만 나는 내 목구멍에 거미줄 치고 산다 너는 죽은 척 숨어서 먹이를 노리지만 나는 홀로 빈 방에 스스로 갇혀 사무치는 그리움만 파먹고 산다 달변의 항문으.. ♧...참한詩 2013.12.29
길/장석남 길 장 석남 바위 위에 팥배나무의 하얀 꽃잎들이 않아 있습니다 바위 속이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팥배나무와 바위 사이 꽃잎들이 내려온 길들을 다 걸어보고 싶습니다 ♧...참한詩 2013.12.29
늙지 않는 화가/김 광규 늙지 않는 화가 김 광규 처음에는 샛노란 개나리 색이나 연분홍진달래 색으로 캔버스를 칠하다가 슬며시 연 녹색으로 바꾸고 짙푸른 녹색을 마구 문지르다가 싫증나면 얼룩덜룩 단풍을 들이고 이모든 색깔들이 맘에 안 들면 화면을 온통 백색으로 칠해 버리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새봄.. ♧...참한詩 2013.12.29
가을 편지/이성선 가을 편지 이 성선 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원고지처럼 하늘이 한 칸씩 비어가고 있습니다 그 빈곳에 맑은 영혼의 잉크 물로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랑함으로 오히려 아무런 말 못 하고 돌려보낸 어제 다시 이르려 해도 그르칠까 차마 또 말못한 오늘 가슴에 고인 말을 이 깊.. ♧...참한詩 2013.12.29
녹비/정일근 녹비 정일근 자운영은 꽃이 만발했을 때 갈아 엎는다 붉은 꽃이며 푸른 잎 싹쓸이 하여 땅에 묻는다 저걸 어쩌나 저걸 어쩌나 당신이 탄식할지라도 그건 농부의 야만이 아니라 꽃의 자비다 꽃 피워서 꿀벌에게 모두 공양하고 가장 아름다운 시간에 자운영은 땅에 묻혀 땅의 향기롭고 부.. ♧...참한詩 2013.12.29
그리운 악마 그리운 악마 이수익 숨겨둔 情婦 하나 있으면 좋겠다 몰래 나홀로 찾아드는 외진 골목길 끝, 그집 불 밝은 창문 그리고 우리 둘 사이 숨막히는 암호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 아무도 눈치 못챌 비밀 사랑, 둘만이 나눠 마시는 죄의 달디단 축배 끝에 싱그러운 젊은 심장의 피가 뛴다면! 찾아.. ♧...참한詩 2013.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