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頂墓地 1 山頂墓地 1 조정권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 ♧...참한詩 2013.12.29
마지막 섹스의 추억/최영미 마지막 섹스의 추억 최영미 아침상 오른 굴비 한 마리 발르다 나는 보았네. 마침내 드러난 육신의 비밀 파헤쳐진 오장육부, 산산이 부서진 살점들 진실이란 이런 것인가. 한꺼풀 벗기면 뼈와 살로만 수습돼 그날 밤 음부처럼 무섭도록 단순해지는 사연 죽은 살 찢으며 나는 알았네. 상처.. ♧...참한詩 2013.12.29
관계/고정희 관계 고정희 싸리꽃 빛깔의 무당기 도지면 여자는 토문강처럼 부풀어 그가 와 주기를 기다렸다 옥수수꽃 흔들리는 벼랑에 앉아 아흔번째 회신없는 편지를 쓰고 막배타고 오라고 전보를 치고 오래 못 살거다 천기를 누설하고 그런 어느 날 그가 왔다 갈대밭 둔덕에서 철없는 철새들이 교.. ♧...참한詩 2013.12.29
나무처럼 외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이성선 나무처럼 외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이성선 바라보면 지상에서 나무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 늘 하늘빛에 젖어서 허공에 팔을 들고 촛불인 듯 지상을 밝혀준다 땅속 깊이 발을 묻고 하늘 구석을 쓸고 있다 머리엔 바람을 이고 별을 이고 악기가 되어 온다 내가 저 나무를 바라보 듯 나.. ♧...참한詩 2013.12.29
루즈가 묻은 담배꽁초는 섹시하다/정호승 루즈가 묻은 담배꽁초는 섹시하다 정호승 새벽 미사가 끝나자 눈이 내린다. 어깨를 구부리고 눈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 롱부츠를 신은 여자가 가로등 불빛 아래 담배를 피우며 서있다. 누그를 기다리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아들의 얼굴이라도 한번 더 보기 위하여 찾아 온 것.. ♧...참한詩 2013.12.29
불륜의 만삭 / 정양 불륜의 만삭 정양 새끼들 퍼내지르기 전에 딱 갈라서라고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을 간신히 참는 때가 더러 있다 무식하게 딱 갈라선다면 피차 얼마나 좋을까마는 눈먼 사랑 때문에 뱃속에 든 애 때문에 이도저도 못해 한평생 원수처럼 사는 이들이 더러 있다 누군들 한 치 앞을 알겠느.. ♧...참한詩 2013.12.29
정거장/민병도 정거장 민병도 그 때 거기서 내렸어야 했다는 것을 기차가 떠나기 전엔 눈치채지 못했네 창 너머 벚꽃에 취해, 오지 않는 시간에 묶여 그 때 거기서 내렸어야 옳았다는 것을 자리를 내줄 때까진 까맣게 알지 못했네 갱상도,돌이 씹히는 사투리와 비 사이 그저 산다는 것은 달력에 밑줄긋.. ♧...참한詩 2013.12.29
라면을 먹는 아침/함민복 라면을 먹는 아침 함민복 프로 가난자인 거지 앞에서 나의 가난을 자랑하기엔 나의 가난이 너무 가난하지만 신문지를 좍 펼쳐놓고 더 많은 국물을 위해 소금을 풀어 라면을 먹는 아침 반찬이 노란 단무지 하나인 것 같지만 나의 식탁은 풍성하다 두루치기 일색인 정치면의 양념으로 팔팔.. ♧...참한詩 2013.12.29
봄날은 간다 /원무현 봄날은 간다 원무현 도끼에 꽃잎이 붙었다 꽃잎에 도끼가 붙었다 서슬도 시퍼런 날을 악물고 거목과 대적해야 할 도끼께서 꽃잎하고 그 짓을 하다니! 순이 귀밑머리에 예쁘게 꽂혀있어야 할 꽃님이 도끼하고 그 짓을 하다니! 도끼다운 도끼, 꽃다운 꽃 뭐 그런 거 도덕률 같은 거 찍어버.. ♧...참한詩 2013.12.29
풀잎 하나를 사랑하는 일도 괴로움입니다 /도종환 풀잎 하나를 사랑하는 일도 괴로움입니다 도종환 풀잎 하나를 사랑하는 일도 괴로움입니다. 별빛 하나를 사랑하는 일도 괴로움입니다. 사랑은 고통입니다. 입술을 깨물며 다짐했던 것들을 우리 손으로 허물기를 몇번 육신을 지탱하는 일 때문에 마음과는 따로 가는 다른 많은 것들 때문.. ♧...참한詩 2013.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