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작 142

공짜로 / 김욱진

공짜로김욱진 나, 이 세상 태어나보니공기도 공짜로 마시고햇볕도 공짜로 쬐고달님별님도 공짜로 보고땅도 공짜로 걷고꽃향기도 공짜로 맡고새소리도 공짜로 듣고생각도 공짜로 하고꿈도 공짜로 꾸고나도 공짜로 먹고이젠 이도 공짜로 심고지하철도 공짜로 타고머잖아 하늘나라도 공짜로 가고허 참, 공짜를 空자로 읽고 보니공짜로 머문 지금, 여기가진짜 나의 우주일세 그려 (2024 시인부락 겨울호)

♧...발표작 2024.10.22

발이 하는 말 / 김욱진

발이 하는 말 아, 어디쯤일까길을 걷다폐휴지 한 리어카 싣고언덕길 오르는 맨발을 보았다, 나는들었다, 발이 하는 말을발가락은 바짝 오므리고 뒤꿈치는 쳐들고그래도 뒤로 밀려 내려가거든헛발질하듯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혓바닥 죽 빼물고 땅바닥 내려다봐써레질하는 소처럼발바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바닥과 바닥은 통하는 법이야그래, 맞아둘이 하나 된 바닥은 바닥 아닌 바닥이지손바닥처럼 그냥 가닿는 대로가닿은 그곳이 바닥이니까여기, 지금, 나는바닥 아닌 바닥에서보이지 않는 발바닥을 보았고바닥없는 바닥아슬아슬 가닿은 발바닥이 내쉬고 들이쉬는 숨소리 들었다비 오듯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 사이로리어카 바퀴가 미끄러져 내려갈 적마다발바닥은 시험에 들었다땀 한 방울 닿았을 뿐인데그 바닥은 난생처음 가닿은 바닥발가락과 발뒤꿈치는..

♧...발표작 2024.10.22

그놈의 애 / 김욱진

그놈의 애김욱진 나에겐 늘 애 하나가 착, 달라붙어 있다그 애가 누구 애인지 모르지만애물단지처럼 나를 졸졸 따라다닌다영화관 앞 지나가면 영화보자 그러고고기 굽는 냄새 풍기면 고기 사먹자 그러고예쁜 여자 지나가면 저 여자 훔쳐보자 그러고가끔 성가실 때도 있지만 애처롭다는 생각 들어그 애가 웃으면 같이 따라 웃고찡그리면 나도 같이 찡그린다어딜 가다 밥 먹자 그러면 밥 먹고잠자자 그러면 잠자고똥마렵다 그러면 애써 똥 누고그러지 않으면, 금세 화 버럭 내는 그 애왜 이러지, 나를 온종일 부려먹고도밤이면 젖먹이처럼 칭얼거리고 보채고버르장머리 확 뜯어고쳐줘야겠다 싶어그놈의 애 저만치 뚝 떼놓고애간장 끓이듯 녹차 한 사발 끓여나 한 잔 그 애 한 잔여기, 지금, 누가 차를 마시고 있냐고애먹은 놈이 애먹인 놈한테 물었..

♧...발표작 2024.07.11

묘연 / 김욱진

묘연김욱진 엄니 살던 흙집에 갈 때마다고양이 먹을거리 주섬주섬 챙겨간다어떤 날은 식구들 발라먹은 생선 가시 조심스레 가져가애간장 녹이듯 나눠주고어쩌다 치킨이라도 한 마리 시켜먹은 날은바삭거리는 껍데기 날개뼈 오도독뼈에다고소한 냄새까지 듬뿍 담아가엄청 큰 보시하듯 훅 던져주면녀석들은 벌떼처럼 달려들어한 동가리씩 오도독오도독 씹어재끼고는땅바닥 뒹굴다가 히죽히죽 웃다가 날 보고 꾸벅!것도 재롱이라고 다음날은아침상에 오른 프라이한 계란 노른자 집사람 몰래 숨겨가노랑나비 날갯짓하듯 한 조각씩 나풀나풀 날려주고그래서인지, 내 발자국 소리만 들리면동네 고양이들이 텅 빈 집으로 우르르 몰려와젖먹이 녀석들은 대놓고 야옹, 야옹 졸라대고나먹은 녀석들은 내 눈치 살살 보며 입맛 쫄쫄 다신다먹이에 길들여진 고양이들어느새 나만..

♧...발표작 2024.05.18

벚꽃 법문

벚꽃 법문 김욱진 봄은 봄이로다. 그 한 마디에 확철대오한 벚나무 한 소식 했다는 소문을 듣고 전국 각처 운수납자들이 모여들었다 경주 불국사 동안거 한 철 나고 간 해와 달과 별 그리고 무수히 스쳐지나간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도반 삼아 벗 삼아, 나 무의 눈을 뜨고 꽃 활짝 피웠다 여기, 지금, 나는 꽃도 아니요, 나무도 아니요 머물되 머문 바 없이 머물고 있는 나 무로 왔다 무로 돌아가는 벗, 아니 벚 꽃이여, 나무여 누가 단박에, 나 무의 봄을 봄 아닌 봄으로 읽고 가려나, 앗!

♧...발표작 2024.04.07

그늘

그늘 김욱진 등나무 아래서 등 굽은 할머니 두 분 마주보고 앉아 주고받는 얘기 등 너머로 엿듣는다 지난 번 디스큰가 뭔가 튀어나왔다더니 수술은 했어? 아니, 가끔 다리 좀 저려도 그냥 등 굽히고 살기로 마음먹었어 드나나나 등 굽히고 꾸벅꾸벅 절하며 지내보니 아들 딸 며느리도 좋아하고 손주 녀석들까지 다 좋아하던데, 뭘 등 꼬장꼬장 세우고 살 때보다 용돈받기도 영 수월하고, 하여튼 그래 그늘 드리워진 등 한쪽, 써늘하다

♧...발표작 2024.04.01

도동측백나무 숲

도동측백나무 숲 속 어지간히 썩었을 거 같다 수백 년 척박한 땅에 뿌리내리고 자수성가한 도동측백나무 숲 천연기념물 1호라는 칭호마저 잃어버렸다니 어쩌겠나, 국보 1호 숭례문도 보물 1호 흥인지문도 다 그렇게 되고 말았는 걸 그나저나, 숫자에 불과한 호칭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도동 주인 노릇하고 살아온 측백나무 틈새로 말채나무 쇠물푸레나무 자귀나무 소태나무 층층나무 회화나무 골담초나무 난티나무…… 도통 듣도 보도 못한 타성바지 나무들이 천연스럽게 비집고 들어와 우후죽순처럼 자라고 있다는 후문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파하듯 누군가 잘 되는 꼴 보면 그저 시샘하고 헐뜯는 우리네 세상 어디, 나무들이라고 별반 다르랴 (2023 천연기념물 1호)

♧...발표작 2023.12.15

그 바람에

그 바람에 김욱진 은행들이 다 털렸다 졸지에 알거지 신세가 되어버린 은행들은 길바닥에 나앉았고 그 소문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구린내가 났다 누구 소행인지 따져볼 겨를도 없이 줄도산 당한 은행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그 바람에 은행 주가는 폭락했고 빚쟁이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 짓뭉개듯 은행 짓밟고 지나갔고 바람은 그냥 빚잔치 한 판 속 시원하게 벌인 듯 지나갔다 그 바람에 빚진 늦가을 바람은 큰길가 신호등 언저리 보도블록 위 은행 신용불량자 딱지처럼 딱 붙어있는 일수대출 광고지 직빵 전화번호부터 슬그머니 떼어내고 있었다 (2022 김명배문학상 작품상 수상작)

♧...발표작 2023.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