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작 142

암, 글쎄

암, 글쎄 비슬산 오르다 우연히 암을 발견했다 등허리 쿡쿡 쑤신 그날 찍은 스냅사진 꼼꼼히 판독해 보니 곳곳에 화강암이다 암 중에서 제일 흔한 암 치밀어 오른 화를 삭이지 못해 생긴 암덩어리들이 몰래 계곡에 모여앉아 계추를 한다 그래서 암계 아니 암괴라 했던가 아니아니 안개처럼 스멀스멀 기어 내려오다 올망졸망 굳어진 암의 전이를 한눈에 다 보는 듯 불화살을 맞은 듯 온몸에 검은 세포가 점점이 박혀있다 얼굴색이 희읍스름하다 암 진단서처럼 빼곡 적혀있는 팻말엔 분명 비슬산 ‘암괴류-돌 너덜겅’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돌강과 애추라는 암 투병 중인 내게로 처방전이 전송되었다 화를 내면 낼수록 암 세포는 더 잘 번진다는… 암, 글쎄 -시인 뉴스 포엠 2020.11

♧...발표작 2021.03.10

여시아문如是我聞

여시아문如是我聞 옥상 고무 다라이에다 고추 모종을 옮겨 심다, 문득 잡초 같은 생각 한 포기 불쑥 뽑아냈더니 지금, 누가, 여기까지 와서 주인 행세 하냐고 고추가 맵싸하게 호통을 쳤다 봐라, 잡초 없는 세상, 어디 있더냐 나는 너의 잡초 너는 나의 잡초 산전수전 다 겪으며 뿌리내리고 주렁주렁 자식 낳고 잠시 더부살이하다 떠나가는 이 마당 참 주인은 흙 한 무더기요 공기 한 숨이요 햇빛 한 줌이요 물 한 모금이요 저토록 무심히 베풀고 돌아가는 허공 보살님들께 경배하시라 고추는 고사하고 풀 한 포기 없을 터 우주 한 모퉁이 나라고 우겨대는 자 누구인가 초라한, 너무도 초라한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주병률의 문학 TV(2020.9.29.) -2020 대구문학 12월호

♧...발표작 2021.03.10

수상한 시국3

수상한 시국‧3 김욱진 동계 방학 자가 연수 중 코로난가 뭔가 불쑥 찾아와 현관 문고리 잡고 가는 바람에 우리 부부 자가 격리 중 이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먼 그러잖아도 각방거처 선언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눈칫밥 한 그릇 얻어먹고 살기도 쉽잖은 팔자인지 눈만 뜨면 손 씻고 입마개하고 한 끼 먹은 밥그릇 숟가락 젓가락 각자 설거지하고 소독하고 화장실 드나들 땐 변기 거울 빚 갚듯 반질반질 다 닦아 줘야 하고 온종일 건네는 말이라고는 밥 먹자, 라는 한 마디 그마저도 눈치 보며 주고받는 일상 지금, 여기, 나는 자가 수양 중이다 자가, 누구인지 자가, 왜 여기 머물고 있는지 자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나 혼자 조용히 묻고 있는 중 (2020 시산맥 가을호)

♧...발표작 2020.12.12

노모 일기·7

노모 일기·7 김욱진 비슬산 기슭 양동마을 코로나 돈다는 소문에 노인정조차 문 다 걸어 잠그고 골목엔 땟거리 구하러 나온 고양이들만 간간이 돌아다닐 뿐 봄은 와서 개나리 벚꽃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이맘때면 쑥 캐서 장에 갔다 파는 재미가 쏠쏠하셨던 어머니 여차저차 생병이 나셨는지 속앓이를 하신건지 며칠째 먹지도 싸지도 못했다는 전화를 받고 부랴, 응급실로 모시고 가 구순 넘은 노구의 몸속을 면경알처럼 싹 다 훔쳐봤다 밥통 똥통 다 틀어 막혀 온통 의혹 덩어리로 울퉁불퉁 몇 달을 못 넘기실 것 같단다 암울한 그 소식 아랑곳 않고 의사 선생은 곧장 링거 꽂고 한 삼 일 굶으면 다 낫는다는 묘약 처방을 내렸다 암, 그러면 그렇지 구십 평생 병원 밥 먹고 누워 있어 본 적 없는데 내가 무신 코레라 빙이라도 들었나..

♧...발표작 2020.12.05

나가 뭐길래

나가 뭐길래 기사를 봤다 이산가족 상봉 신청했다 탈락한 구순 할아버지 요번엔 내 차롄 줄 알았는데 나보다 더 오래된 나가 더 있었나 보네 나가 뭐길래 별거 아닌 줄 알고 숨겨뒀던 나 어느새 녹이 다 슬어버렸다 나와 나 사이 장벽을 허무는 것도 나였단 말이지 나도 몰래 나를 탓하며 이젠 다시는 속지 말아야지 38선쯤이야 나만 먹으면 언제든 넘어갈 수 있어 이렇게 나를 달래며 살살 나 먹어 왔는데 아직도 나가 모자라 떨어졌다 하니 나를 떨어뜨린 그놈의 나는 먹어도 먹어도 배부른 줄 모르고 나만 맨날 손꼽아 세며 어리광부리는 나가 되고 말았네 저승 가기보다 더 힘들어진 저 북녘 고향 나 하나 더 먹은 형 살아 있다는 소식에 나를 먹고 날을 먹고 꾸역꾸역 살아 있었는데 이제, 나만 같고 떼쓰는 날 몇 날이나 남..

♧...발표작 2020.12.05

거울 보는 새

거울 보는 새 김욱진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경구 한 줄 적힌 수돗가 거울 앞 참새 한 마리 날아와 앉아 두리번두리번 살피다 거울 뚫어지라 유심히 들여다본다 여기, 지금, 나는 누구인가 묻고 있는, 참 새는 나를 보더니 놀란 듯 민망한 듯 발가락 오므리고 쫑쫑 수돗가로 걸어가 똑똑 떨어지는 물 한 방울 콕콕 쪼아 먹고 거울 밖으로 훨훨 날아오른다 나는 새다 나는 새다 그러는 새, 나는 새는 수도꼭지만 멍하니 쳐다보다 거울 속으로 돌아갔다 안팎 없는 저, 허공 한 무더기 새는 또 어디로 돌아갔는가 (2022 김명배문학상 작품상, 2023 도동문학 작품상 선정작)

♧...발표작 2020.12.05

非비

非비 김욱진 겉보기엔 이란성 쌍둥이 같고 아니, 지네 발가락 같고 아니 아니, 자물쇠 구멍 비비대는 열쇠 같은데 非는 아니다, 아니다 그런다 관상을 보니 올곧은 성품 타고난지라 아닌 것은 아니다, 딱 잘라 말하는 선비 기질이 있고 때로는 말머리 바짝 달라붙어 은근슬쩍 비비 꼬는 노비 기질도 있어 난데없는 시시비비에 곧잘 휘말릴 거 같다 (혹자는 非가 양비론적이라고 비아냥거리겠지만) 천생 非는 非다 주인 앞에서 바른말만 콕콕하는 비비 새의 양 날개가 똑같아 보여도 오른쪽 날개는 왼 날개로 쓰지 못하고 왼 날개는 오른쪽에 달지 못한다 서로 맞지 않아서 아니다, 아니다 서로 아니다, 라고 하지만 새는 왼쪽 오른쪽 날개 둘이 있어야 날 수 있다 너와 나도 그렇다 둘이 아니다 아니다, 우겨대면서도 하나가 아니다 ..

♧...발표작 2020.12.05

누에씨

누에씨 시를 왜 짓는가, 라는 물음에 씨는 그냥 문득 떠오른 누에처럼 시를 짓는다고 실실 얼버무리자 누에는 금세 전생으로 돌아가 알을 슬었고 뭔가를 짓는다는 좁쌀 만 한 생각으로 알은 꼬물꼬물 거리기 시작했다 까막눈으로 돌가루 종이 위에 뒹굴다가 평수 넓은 신문지로 이사 와서는 뽕잎처럼 잘게 쓴 시를 다문다문 읽는 기분으로 시상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한 줄 두 줄 행간이 생겼고, 거기에 누워 먹고 싸고 잠자면서도 온몸에 뭔가 허전한 구석이 늘 배어있음을 느끼고부터 누에는 자나 깨나 오고 가는 길 묻고 물으며 잠잠히 시를 짓기 시작했다 한 잠을 자고 나서는 허기를 참지 못해 뽕잎에만 눈독을 들였다고 두 잠을 자고 나서는 뽕잎에 딸려온 오디 맛을 난생처음 보았고 어딘가에 뽕나무가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였다고..

♧...발표작 2020.07.11

패 김욱진 편을 갈라 화투를 치다 보면 패가 잘 풀리는 사람과 한 편이 되는 날은 이 눈치 저 눈치 볼 것 없이 그저 푹 무질고 앉아 싸 붙이고는 엉덩이만 들썩여도 돈이 절로 굴러 들어온다 패라는 게 그렇다 꽃놀이패에 걸려 패싸움을 하다가도 팻감이 없으면 한 방에 폐가망신 해버리기도 하고 패거리도 그렇다 얼씬 보기엔 반상 최대의 패처럼 보여서 누구나 한번쯤은 이 패거리 저 패거리 기웃거려 보는 거다 별 밑천 없이 들락날락하기도 편하고 급할 시는 그 패를 마패처럼 내밀어 은근슬쩍 방패막이로 써먹기도 하고 팻감이 궁할 땐 이 패에서 저 패로 저 패에서 이 패로 철새처럼 줄줄이 옮겨 다니면서 늘상 화기애애한 척 돌돌 뭉쳐 돌아다니며 놀고먹기엔 딱 그저 그만이다 패가 폐가 되는 줄도 모르고 패거리가 난무하는 세..

♧...발표작 2020.07.11

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김욱진 시집 한 권 냈다고 팔십 평생 땅뙈기 일구고 산 오촌 당숙께 보내드렸더니 달포 만에 답이 왔다 까막눈한테 뭘 이래 마이 지어 보냈노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시를, 우린 시래기 국만 끓여먹고 살아도 배부른데 허기야, 물 주고 거름 주고 애써 지은 거 아무 맛도 모르고 질겅질겅 씹어 봐도 그렇고 입맛 없을 때 한 이파리씩 넣고 푹 삶아먹으면 좋것다 요즘은 시 나부랭이 같은 시래기가 금값 아이가 이전에 장날마다 약장수 영감 따라 와서 한 많은 대동강 한 가락 불러 넘기고 한 바탕 이바구하던 그 여자 시방도 어데서 옷고름 풀듯 말듯 애간장 태우며 산삼뿌리 쏙 빼닮은 만병통치약 팔고 있나 모르것다 그나저나 니 지어 논 시 닭 모이 주듯 시답잖게 술술 읽어보이 청춘에 과부 되어 시집..

♧...발표작 2020.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