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작 142

어느 봄날

어느 봄날 김욱진 개와 개나리 사이 무슨 연분이 있을 리도 만무하고 아파트 담벼락 활짝 핀 개나리 앞에서 산책 나온 개 두 마리 난리를 치네요 멀건 대낮 입마개한 사람들은 벚꽃 벗고-옷 그러며 지나가는데 누런 수캐는 혀를 빼물고 꽁무니 빼는 암캐 등에 확 올라탑니다 개 나리, 난 나리 쏙 빼닮은 개를 낳고 싶어요 코로나로 들끓는 이 난리 통에도, 참 사랑은 싹이 트네요 개 난리 통에 개나리는 참 난감했겠습니다 이 화창한 봄날 성이 차지 않은 게 어디 걔들뿐이었겠습니까 마는 사정없이 떠나는 봄도 어지간히 다급했나 봅니다 (2022 시인부락 봄호)

♧...발표작 2022.04.03

이들의 반란

이들의 반란 김욱진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살지, 뭐 이 말 엿들은 어떤 이는 몽니를 부렸고 또 어떤 이는 치를 떨었다 치심이 곧 민심인 이 세상 이간질하는 이들 다독이며 이 수리 센터 갔다 언제 뽑혀나갈지도 모르는 이들 위아래 닥지닥지 붙어 서서 난생처음 사진을 찍었다 저마다 표정이 사뭇 달랐다 나는 웃는다고 웃었는데, 이들은 비웃었다 개중엔 억지로 웃다 찡그린 이도 있었고 웃자, 웃자 그러는 이도 있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이들, 속으로는 다 이 악물고 있었다 한 곳에 뿌리 내리고 살아온 이들 환갑 진갑 다 지나고 보니, 그 이가 그 이 온데 물어뜯고 할퀴며 땟거리 장만해주던 송곳니도 언제 어디서나 잘도 씹어재끼던 어금니도 사시사철 수문장 노릇하며 대문 든든히 지켜주던 대문니도 이 평생 더부살이해온 ..

♧...발표작 2021.11.27

비참거사우참오기소참하고

비참거사우참오기소참하고 김욱진 비 비슬산 참꽃 시화전 참 참꽃 따먹어 본 사람들은 다 왔더라 거 거시기, 시 시하고 그 그림하고 사 사바사바했다는 얘기 아이가 우 우리 나엔 다 그림의 떡이구먼 참 참꽃 그 그림 기막히게 잘 그렸더라 오 오가는 길을 막고, 기를 막고 기 기막히게 몸부림치더라 소 소쩍이는 소쩍소쩍 참 참새는 짹짹 하 하늘다람쥐는 입맛만 쪽쪽 다시더라 고 고게 다 시더라, 그림이더라 (2021 대구알리기 문학 페스티벌)

♧...발표작 2021.11.2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자년 말 고삐 잡고 말 엉덩이 툭, 쳐 봅니다 다급히, 지나가는 말처럼…… 우리 속엔 말이 말을 물고 돌아다니는 코로나라는 말만 우글거렸어요 일 년 내내 우리는 그 말을 길들였지요 말 많은 나는 된서리를 맞았어요 우리 속에 갇힌 수많은 말들이 말문을 잃어버렸거든요 참다, 참다 못해 말꼬리라도 한번 슬몃 잡으면 그 말은, 말인즉슨 말이 아닌 비말 취급을 받고 말았으니 말이지요 말들은 다 숨죽이고 살 수밖에요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 했던가요 말과 말 사이 오간 비말은 거짓말처럼 번졌어요 말이란 말에는 다 끼어들고 소문이란 소문은 다 퍼뜨렸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들은 말머리 돌리지 않고 말꼬리만 잘랐지요 아무도 그 말을 하지 않았어요 아니, 할 수가 없었지요 저기, 끄레기 벗고 뚜벅뚜..

♧...발표작 2021.11.26

불이不二·2

불이不二·2 김욱진 맨발로 숲길을 걷는다 더럽게 맨발로 와서 온 숲을 오염시키느냐고 새들은 재잘재잘 돌멩이들도 구시렁구시렁 딴지를 건다 한 발 한 발 뗄 때마다 어떤 흙은 새끼발가락 새로 끼어들어 이 발가락새끼 간지러워 미치겠다며 깔깔 웃어재끼고 또 어떤 흙은 발바닥에 살살 달라붙어 젖먹이처럼 칭얼거린다 살과 살 사이 끼어들고 달라붙는 건 너나 나나 마찬가지 나는 흙의 발가락이 되고 흙은 나의 발바닥이 되는 순간 나의 발은 순한 흙발이 된다 흙이 숲길을 걷는다 맨발로 걸으니, 그러니 심사가 둘이 아님을, 뼈저리게 발가락은 오므라들었고 발바닥은 펴졌다 나도 모르게 외진 숲길 한 모퉁이서 맨발과 맨흙이 조용히 만나 둘이 하나가 된다 숲이 된다

♧...발표작 2021.08.13

어느 봄날

어느 봄날 개와 개나리 사이 무슨 연분이 있을 리도 만무하고 아파트 담벼락 활짝 핀 개나리 앞에서 산책 나온 개 두 마리 난리를 치네요 멀건 대낮 입마개한 사람들은 벚꽃 벗고-옷 그러며 지나가는데 누런 수캐는 혀를 빼물고 꽁무니 빼는 암캐 등에 확 올라탑니다 개 나리, 난 나리 쏙 빼닮은 개를 낳고 싶어요 코로나로 들끓는 이 난리 통에도, 참 사랑은 싹이 트네요 개 난리 통에 개나리는 참 난감했겠습니다 이 화창한 봄날 성이 차지 않은 게 어디 걔들뿐이었겠습니까 마는 사정없이 떠나는 봄도 어지간히 다급했나 봅니다 (2021 문경문학 16호)

♧...발표작 2021.04.13

살맛나는 세상

살맛나는 세상 김욱진 얼마 전 정년퇴직을 했거든요 고향 친구들 간간이 전화 와서 요즘 백수 된 기분 어떠냐고 물으면 살맛이 난다 그러지요 그래도 꼬치꼬치 물으면 진담 반 농담 반 봄 꼬치꼬치 흐드러지게 피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한참 너스레를 떨지요 아침 먹고 동네 한 바퀴 돌다 보면 개나리 목련 벚꽃 죽 나와 서서 인사하는 거 다 받아줘야지요 이름 모를 새들 날아와서 노래 부르는 거 다 들어줘야지요 멀리서 친정집처럼 찾아온 벌 나비들 가족사진 한 장씩 찍어둬야지요 눈 퀭한 길고양이들 새우깡이라도 한낱 던져줘야지요 그러고 노인정 앞 툇마루 둘러앉아 윷놀이하는 할머니들 윷말 다 써줘야지요 도 앞에 개 나온 할머니 인상이 죽을 맛인데 멍멍 짖고 지나가는 개 멍하니 쳐다보는 척하며 윷말을 은근슬쩍 윷에다..

♧...발표작 2021.04.12

금호강변

금호강변 바람이 분다 강 한복판 일렬로 죽 늘어선 물결 뒤뚱뒤뚱 몸부림친다 청둥오리 수 천 마리 한꺼번에 물 위로 둥둥 떠올랐다 사라지고 물수제비 떠가듯 연이어 뒤따라오는 저 행렬 좀 봐라 물빛 사이로 담방담방 떠올랐다 사라지는 해질녘 금호강변 둘레길 걷다 텅 빈 나뭇가지 와 앉은 이름 모를 새 한 마리와 무심결에 바라보았다 거꾸로 거슬러 올라오는 마파람에 강물은 그냥 오리발 내밀며 물오리가 되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오가는 사람들은 강물에 물오리 한 마리 없다고 투덜거리며 지나갔다 -2021 시인부락 봄호

♧...발표작 2021.03.10

나무의자

나무의자 물속에 가라앉은 나무의자 하나 미라처럼 등을 바닥에 대고 못 한 모퉁이 조용히 누워있다 지나가다 언뜻 보면 평생 누군가의 엉덩이 치받들고 꼿꼿이 앉아 등받이 노릇만 하고 살다 이제 두 다리 쭉 뻗고 누워 노후를 편히 쉬는 듯한 모양새다 그 자세가 부러웠던지 물오리 떼 간간이 찾아와 근심 풀듯 물갈퀴 풀어놓고 앉아 쉬, 하다 가고 그 소문 들은 물고기들도 어항 드나들듯 시시때때로 와서 쉬었다 가는데, 저 나 무의 자는 더 이상 나무도 아니고, 의자도 아니다 앉으나 누워나, 성당 못 오가는 사람들 쉼터 되어주다 못 속으로 돌아가 못 다 둘러빠지는 그 순간까지 십자가 걸머지고 가는 나 무의 자는 나무로 왔다 의자로 살다 못으로 돌아간 성자 -2021 대구문학 3월호

♧...발표작 2021.03.10

빈집

빈집 내게는 집이 여러 채 있다 그중에 으뜸은 우주宇宙 한 모퉁이 분양받은 몸집 제일 꼭대기 층엔 골방 둘 그 아래층은 초능력 통신망 닥지닥지 붙은 방 다섯 거기서 숨 한번 길게 들이쉬고 내려서면 마주 보고 마음 나누는 방이 둘 그 아래 밥집 한 채 또 그 아랜 똥집 맨 아래층엔 몸종 거처하는 행랑채 둘 휘, 돌아보니 여태 내가 줄곧 거처한 곳은 오감五感 가득 채워진 빈 방 그 사이 아랫목 구둘 꽉 막혔다 설마, 장작불 활활 지펴대면 막힌 구둘 펑 뚫리겠지, 싶어 행랑채 뒤로 돌아들어가 굴뚝 쿡쿡 들쑤시며 간신히 고개 밀어 넣고 슥, 올려다보니 방마다 주인 노릇하던 놈들 뿔뿔이 다 도망치고, 없다 -대구일보2021.2.21

♧...발표작 2021.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