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작 142

무료급식소

무료급식소 김욱진 수성못 둑을 돌다 보면 둑 가에 죽 둘러서서 새우깡을 새우처럼 방생하는 이들이 있다 그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져 눈치코치 없는 꼬맹이 물고기들도 다 안다 온종일 북적이는 무료급식소 새우깡 몇 물속으로 던져주면 금세 새우들은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고 어디선가 그 냄새 맡고 몰려온 물고기들은 새우 한 마리 먼저 낚아채려고 죽기 살기로 달려든다 개중엔 동네 건달 행세하며 떼 지어 몰려다니는 패거리족도 있고 새끼 입에 들어가는 새우 꼬리 깡 물고 뜯어먹는 얌체족도 있지만 그래도 부지기수는 자식새끼 먹여 살릴 땟거리 구하려고 한평생 헤엄치며 돌아다닌 나 많은 물고기들 물 한 모금으로 아침 때우고 오늘은 어딜 가서 밥값을 하나 허구한 날 고민했을 이상화 시비 앞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귀동냥만..

♧...발표작 2023.11.03

한두레 마을 염소 이야기

한두레 마을 염소 이야기 김욱진 초등학교 때 나는 염소 동아리 반장을 한 적 있다 요즘 말로 하자면 근로 장학생인 셈이다 가정 형편 어려운 나는 장학금 턱으로 어린 암염소 한 마리를 받았다 소 키우는 집이 엄청 부러웠던 그 시절 학교만 갔다 오면 나는 염소 고삐 잡고 졸졸 따라다니며 허기진 배를 채웠다 그 염소가 자라 이듬해 새끼 두 마리를 낳았다 그 중 수놈은 팔아 중학교 입학금 마련하고 암놈은 건넛집 할머니랑 사는 여자아이에게 분양했다 희망 사다리 오른 그 아이도 어미 염소 되도록 길러 새끼 낳으면 릴레이식으로 건네주는 염소 동아리 염소 한 마리가 새끼를 낳고 그 새끼가 또 새끼 낳고 낳아 육십여 호 되는 한두레 마을은 어느새 염소 한 마리 없는 집이 없었다 뿔 맞대고 티격태격하던 이웃들 염소 교배시..

♧...발표작 2023.10.25

대가족

대가족 김욱진 엄니 살아생전 우리 집은 손이 귀하다고 늘 그러시며 고양이들만 찾아와도 손주 본 듯 반갑게 이밥에다 멸치 동가리 몇 얹어 봉당에 놓아두고 그러셨는데 엄니 떠난 그 집엔, 어느새 고양이 3대가 옹기종기 모여 산다 주인 노릇하면서 간간이 돌아다니는 생쥐도 잡고 이 골목 저 골목 땟거리 구하러 다니다가도 큰 볼일 작은 볼일 볼 때면 우리 집 텃밭으로 쫓아와 엉덩이 넙죽 까발리고 거름 주듯 똥 누고 언저리 흙 긁어 덮고 물 주듯 오줌 누고, 그 기운에 고추는 주렁주렁 가지는 반들반들 방울토마토는 올망졸망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그러다가도 가끔 나만 찾아가면 고양이 여섯 마리 마당 한복판 오도카니 둘러앉아 입맛 쪽쪽 다신다 엄니 생각에 계란노른자 후라이해서 하나씩 던져주면 손주 녀석들은 게 눈 감..

♧...발표작 2023.07.06

AI

AI 김욱진 저 아이 요즘 뭐든지 물으면 척척 대답을 다해준다고? 에이, 세상에 그런 아이가 어디 있어 태어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말로만 듣던 AI, 딴 세상 얘기처럼 들리더니만 어느새 그 아이가 이렇게 많이 컸어 챗GPT라고 부른다면서 그래, 맞아 조무래기라고 얕보지 말게 지난 번 이세돌 하고 바둑 둬서 이겼다는 그 아이야 그럼, 돌아이구만 이게 어디 사람 사는 세상인가 야, 이 친구야 지금, 여기 농담할 상황 아닐세 머잖아 자동차 자율주행 운전도 저 아이가 하고 자네가 몇날며칠 끙끙거려 짓는다는 시 한 편 저 아이는 몇 초 만에 후딱 써버린다네 시면 시, 소설이면 소설 심지어 나의 일기까지도 줄줄 다 써준다네 짧다 그러면 금방 늘여주고 좀 길다 그러면 눈치껏 줄여주고 “…해줘" “…알려줘" 하면..

♧...발표작 2023.07.03

상화 고택

상화 고택 오랜만에 고향집 온 듯 푸근하다 상화 시비 앞에서 사진 한 장, 찰칵 타는 목마름으로* 마당가 우두커니 서있는 석류나무 물 한 바가지 부어주고 부엌 들어가 솥뚜껑도 열어보고 무슨 시제라도 한낱 받아갈까 싶어 부지깽이로 텅 빈 아궁이 속 타다 남은 재 긁적거리고 있던 참 나의 침실로 자꾸 들오라는 상화 형 * 김지하의 시제에서 빌려옴 -2022 중구를 노래하다 시화전

♧...발표작 2022.10.23

나는 땅 부자다 외 1편

나는 땅 부자다 아버지 살아생전 옆집 다랑논 서너 마지기 붙여먹고 살면서도 나는 땅 부자다, 땅 부자다 늘 그러셨는데 고 말씀 고대로 물려받았다 걷다, 문득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땅, 나는 땅의 아들 땅 부자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땅 나 혼자 걷다 보면 그 땅은 온전히 나의 땅이 되고 만다 이런 날은 오두막 같은 찻집에 들어가 삼천 원짜리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땅 주인 노릇을 한다 여보시오, 이곳은 쓸 땅이 없는 거 같소 그러면, 동남아 종업원 아가씨 설탕 한 봉다리 들고 쫓아와 썰∼땅 쓸 땅 여기 있어요, 하면서 연신 고개를 숙인다 이 맛에 나는 쓸모없는 땅만 죽도록 밟고 다닌다 땅값이 얼마냐고 평수가 얼마나 되냐고 묻는 이 없어 참, 좋다 (시작노트) 아무도 가지 않은 듯한 길 한 모퉁이 조용한 찻..

♧...발표작 2022.10.23

옻골마을

옻골마을 김욱진 물빛 시회 연다는 소문만 듣고 꼭꼭 숨겨진 옻골 어렵사리 찾아갔다 북에는 팔공산 동에는 검덕봉 서로는 긴 등이 못 안골까지 이어져 병풍처럼 펼쳐지고 남으로는 느티나무 고목들이 숲을 이룬 옻골 사방을 둘러봐도 옻나무 한 그루 눈에 띄지 않는데 옻골이라고 마을 들머리 옷걸이처럼 걸렸다 금세 나는 옻에 닿았다 '칠하다' '칠흑 같다' 라는 말, 문득 시절 인연처럼 왔다 간다 그래, 오늘의 시제는 '칠하다'가 좋겠어 양지는 음지를 칠하고 음지는 양지를 칠하며 사백 성상 뿌리내린 경주최씨 세거지 옻나무 골까지 왔으니 이참에, 옻닭이라도 한 마리 푹 꽈먹고 여태 썩고 썩은 속 옻칠이나 해둬야겠다 대암산 꼭대기 우뚝 솟은 거북바위 등처럼 거무죽죽하게

♧...발표작 2022.06.30

까치 설날

까치 설날 설이, 설익은 설이 감나무골 둥지 틀고 사는 까치네 동네까지 설설 왔네요 까치발 들고 이 집 저 집 묵은 세배하며 돌아다니던 섣달그믐날 까치는 장돌뱅이 김 영감네 처마 밑 서리서리 엮어둔 과메기 한 동가리 쪼아 먹고, 꾸벅 옆집 꼬부랑 할머니 장독대 위 정안수처럼 떠놓은 감주 한 모금 고수레하듯 던져준 콩강정 한 조각 받아먹고, 꾸벅꾸벅 봉당에 벗어둔 꼬마아이 코고무신 한번 신어보고도, 꾸벅 오늘은 우리우리 설날이라며 마냥 설레던 밤 잠자면 눈썹 센다고 온 동네 소꿉친구 다 모여 이거리 저거리 각거리 천두만두 두만두… 각설이 타령하듯 흥얼거리며 밤새 잠 설쳐댄 까치 설날 이 설도 머잖아 눈 녹듯 사라져버리겠지요 (2022대구문학 4월호)

♧...발표작 2022.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