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의 합창 유월의 합창 저녁상을 물리고 마당 한구석 툇마루에 나와 앉아 건너편 논배미 물끄러미 바라본다 못자리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모들이 소풍 나온 유치원 아이들처럼 물속에 발 담근 채 나란히 줄지어 서 있다 알에서 갓 깨어난 올챙이들도 지금쯤은 막둥이 같은 꼬리 애써 지우며 두 발 다소곳 .. ♧...비슬산 사계 2010.05.21
우체통 우체통 아직도 내 전생의 주소와 이름과 얼굴마저 기억하고 있을 것만 같은 우체통에 도둑 들었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는가? 모래알처럼 파삭파삭해진 세상인심 속에서도 언제나 문 활짝 열어 두고 사는 집 한 평도 채 되지 않는 비좁은 방에서 처음 만난 인연들 겹겹이 포개고 누워 하룻밤 묵어가는 .. ♧...비슬산 사계 2010.05.21
자화상 자화상 1 꽃내음 그윽한 초여름 밤, 나는 어느 산골 마을 한 모퉁이서 옹골찬 밤송이로 태어났어 바람이 불 땐 고슴도치처럼 온몸을 웅크리고 눈감은 채 바람결 따라 허공을 찔러대며 하염없이 막춤을 추었지 누군가 내 곁으로 와 간간이 노래도 불러주었고, 더러는 내 이름을 부르며 지나가는 목소리.. ♧...비슬산 사계 2010.05.21
수수밭에서 수수밭에서 만물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늦가을 해거름 들녘 수숫대 무릎 사이로 S라인 몸매를 뽐내며 기어드는 능구렁이 한 마리 구불구불 밭고랑 넘다 허기진 듯 오롯 남은 새 발자국 들여다보며 못내 혀끝을 날름거린다 수수 몇 알 입에 물고 수수대궁 끄트머리 떼지어 앉아 있는 참새 한 무더기 발가.. ♧...비슬산 사계 2010.05.21
메아리 메아리 해질녘, 누군가 산등성이 기대어 ‘야호’불러놓고 갔다 이름 불려진 한 아이가 이 산등성이서 저 산등성이로 공중곡예하듯 건너간다 연이어 그 아이 빼닮은 쌍둥이 그림자도 바르르 떨며 뒤따라간다 물수제비처럼 번지는 그리움 찾아 온 산 헤매다, 홀로 미아가 되어버린 아이 새벽녘 어디선.. ♧...비슬산 사계 2010.05.21
섣달그믐밤 섣달그믐밤 일제시대 처녀 공출 바람에 열여섯 어린 나이로 안동김씨 종갓집에 시집와 서른이 다 되도록 씨받이 아들놈 하나 못 낳은 울 어매 시조모 제삿날 밥 한술 지어 올리려고 시렁 위에 얹어둔 쌀 한 됫박 몰래 퍼 들고 용하다는 점쟁이 찾아가 댓잎 휘두르는 친정할미 혼 앞에서 애걸복걸하다 .. ♧...비슬산 사계 2010.05.21
고요의 성자 고요의 성자 -벙어리 우주의 소릴 눈으로 듣고 말하는 깊게 잠든 그의 귀와 입은 묵묵부답 우뢰 같은 소리 귓전을 휘갈겨도 잠잠하기만 한 눈빛 하나로 온 세상을 벗하는 고요의 성자 텅 비어버린 그의 입과 귀는 내생을 염念하고 온몸 가득 뿌리내린 그의 눈은 숫제 선정禪定에 들다 ♧...비슬산 사계 2010.05.21
인생 스케치 인생 스케치 마흔이 넘어서야 비로소 나는 알았네 내 몸이라 여겼던 병아리 같은 자식도 질경이, 꽃다지, 쑥부쟁이들 마냥 언젠가는 길섶에서 먼지 덮어쓰고 저 홀로, 묵묵히 살아가야 함을 해질 무렵 피어오르는 분꽃들의 손짓에도 눈 부릅뜨고 퍼부어댈 마누라의 홀대에도 그냥 그런 표정 지어 보이.. ♧...비슬산 사계 2010.05.21
공룡, 발자국 공룡, 발자국 -상족암에서 누가 이토록 뜨겁게 살다 갔나 외진 바닷가 한 모퉁이 망사 같은 잔솔가지 살몃 걸치고 알몸으로 길게 드러누운 병풍바위는 아직도 수 억년 전의 추억을 머금은 채 누군가 남기고 간 발자취의 주인을 찾고 있으니 까마득한 전전생의 인연 찾아가듯 이제, 태초의 몸짓으로 한 .. ♧...비슬산 사계 2010.05.21
갓바위 돌부처 갓바위 돌부처 팔공산 관봉 평갓 머리인 돌부처 무슨 영험으로 양약을 빚는지 온 세상 떠도는 병이란 병은 향불 사르듯 훌훌 날려버리시고 입시철이면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천안통의 묘리로 쪽집게 과외마저 하시니 다음 생엔 저 돌부처의 아들로 환생하고 싶다 ♧...비슬산 사계 2010.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