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안거/김현옥 동안거 김현옥 거둬들인 인연들 키질하고 보니 하아 알곡 몇 안 되더군 쭉정이들 미련 없이 날려버리고 그 알곡으로 가난한 가슴 연명해 왔지만 그나마 곯아 죽지 않을 정도니 인연 농사 영 망친 건 아니더군 사십 몇 년 오래 농사지었어도 아직도 풍년 들려면 한참 멀었더군 묵은 된장처럼 묵은 김치.. ♧...참한詩 2010.11.09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김 사 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려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 ♧...참한詩 2010.11.08
지 살자고 하는 짓/하종오 지 살자고 하는 짓 하종오 밭고랑에서 삐끗해 금 간 다리뼈 겨우 붙으니 늙은 어머니는 무릎걸음으로 엉금엉금 마당가로 가 참나무 아래서 도토리 주워 껍질 까다가 막내아들이 쉬라고 하면 내뱉었다 놔둬라이, 뼈에 숭숭 드나드는 바람 달래는 거여 장가 못 든 쉰줄 막내아들이 홀로 된 여든줄 어머.. ♧...참한詩 2010.11.08
여름 半 가을 半/박재삼 여름 半 가을 半 박재삼 낮에는 쨍쨍한 불볕을 살에 받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찬바람도 더러 느끼는 이 여름 半 가을 半 그러나 그것이 다시 가을날씨 하나로 기울어져 시세가 나다가 가을半 겨울半을 겪다가 ㆍㆍㆍㆍㆍㆍ 하늘의 이 그윽한 움직임에는 사람은 지치는 일 없건만 한 목숨씩 따로따로 열.. ♧...참한詩 2010.11.08
붉은 달/안도현 붉은 달 안도현 그해 여름 아버지는 수박밭에다 수박을 심어놓고 첫물을 한번 따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다 수박밭에는 수박 대신 둥근 슬픔들이 가족을 이루고 있었다 내가 수박 속에 담긴 붉은 달을 떠올리고 있을 때 저 달이라도 내다 팔아보자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타이탄 트럭 하나 가득 달을 싣고 .. ♧...참한詩 2010.11.08
특급열차를 타고 가다가/신경림 특급열차를 타고 가다가 신 경림 이렇게 서둘러 달려갈 일이 무언가 환한 봄 햇살 꽃그늘 속의 설렘도 보지 못하고 날아가듯 달려가 내가 할 일이 무언가 예순에 더 몇해를 보아온 같은 풍경과 말들 종착역에서도 그것들이 기다리겠지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산역에서 차를 버리자 그리고 걷자 발이 부.. ♧...참한詩 2010.11.08
테두리로 본다는 것/박남희 테두리로 본다는 것 박남희 그는 알이 없는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본다 멋을 위한 것일까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희뿌연 달무리가 떠오른다 달에게 달무리는 왜 필요할까를 생각해보면 안경 테두리의 효용을 이해할 수 있다 눈과 세상 사이가 너무 황홀해 그 사이에 유리는 빼고 그냥 테두리.. ♧...참한詩 2010.11.08
밥값 외 2편/정호승 밥값 외 2편 정호승 어머니 아무래도 제가 지옥에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아침에 출근하듯이 갔다가 저녁에 퇴근하듯이 다녀오겠습니다 식사 거르지 마시고 꼭꼭 씹어서 잡수시고 외출하실 때는 가스불 꼭 잠그시고 너무 염려하지는 마세요 지옥도 사람 사는 곳이겠지요 지금이라도 밥값.. ♧...참한詩 2010.11.07
빈 화분을 보며/유종인 빈 화분을 보며 유종인 꽃 대신 고추 모종을 빈 화분에 심는 노파여 당신의 머리에는 백초(白草)가 성성하여 가벼운 몸분(盆)엔 벌써 저승꽃이 거뭇해라 한 계절을 비워냈기로 관(棺)으로 쓰일 소냐 여우비를 심어볼까 천뢰(天籟)의 시를 옮겨볼까 아니야, 광야를 불러다 숨통 하날 틔워보자 ♧...참한詩 2010.11.06
만행 만행 이석구 늦은 저녁 비 온다 땅콩만 한 빗방울이다 투두둑 운주사 와불 집 밖을 나설 때부터 좀약 냄새가 난다 맨살을 덮을수록 바람에 날릴 것 같은 휘어진 등에 걸쳐 걸어가며 입어야 할 내 생애 옷 한 벌이라 세탁하여 말린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허물일까 아무데나 발 닿아도 문 열고 달을 .. ♧...참한詩 2010.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