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그리다/장석주 수그리다 장석주 바람 섞여 진눈깨비 치는 저녁, 흘러나온 불빛이 코뚜레 뚫은 송아지처럼 길게길게 운다. 길 나서지 못한 사람 살고 있다고, 가는 저녁 다시 못 온다고 다정한 몸 속으로 울음이 뭉턱하게 밀려든다. 저녁마다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것들 속에서 무릎 아래 그림자 키우는 누군가의 재개.. ♧...참한詩 2011.08.20
그게 배롱나무인 줄 몰랐다/김태형 그게 배롱나무인 줄 몰랐다 김태형 오래된 창문 밖에 마른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 그 동안 누가 저 나무 아래 웅크리고 앉아 겨드랑이를 간질이고 갔는지는 모르지만 등줄기가 가려울 때마다 몇 차례 누런 허물을 벗고 딱딱한 비늘에 윤기마저 도는지 세 치쯤 되는 공중이 이내 그늘을 드리우.. ♧...참한詩 2011.08.15
입추/조운 큰꽃으아리 Clematis patens 입추 - 조운(1900~?) 봄가고 여름도 가고 이제는 또 가을이다 누구라 하나 곱다는 이 없것만은 철없는 이 마음은 오는 철 가는 철에 무엇을 이리도 기다리노? 지는 꽃을 지는 꽃을 어떻게 합니까 꾀꼬리가 운대도 모르는 척하고 저 혼자 지는 꽃을 어떻게 합니까. 여름 가면 가을 .. ♧...참한詩 2011.08.15
벼락 키스/김언희 느티나무 Zelkova serrata 벼락 키스 - 김언희(1953~ ) 벼락을 맞는 동안 나무는 뭘 했을까 번개가 입 속으로 치고 들어가 자궁을 뚫고 나오는 동안 벼락에 입술을 대고 나무가 벼락을 맞았다. 마을 한가운데에 서서 온몸으로 벼락을 받아냈다. 벼락을 맞으며 나무가 정말 사람의 마을, 사람의 안위를 걱정했.. ♧...참한詩 2011.08.15
국수/백석 국수 백석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 ♧...참한詩 2011.07.26
맨드라미/김명인 맨드라미 김명인 붉은 벽에 손톱으로 긁어놓은 저 흔적의 주인공은 이미 부재의 늪으로 이사 갔겠다 진정 아프게 문질러댄 것은 살이었으므로 허공을 피워 문 맨드라미는 지금 생생하게 하루를 새기는 중! 찢긴 손톱으로 이별을 긁어대는 오늘의 사랑 뜨겁다 아침의 하늘에 날개 자국 하나 흘리지 않.. ♧...참한詩 2011.07.26
별/신용목 별 신용목 밤의 입천장에 박힌 잔이빨들, 뾰족하다 저 아귀에 물리면 모든 罪가 아름답겠다 독사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는, 별의 갈퀴 하얀 독으로 스미는 罪가 나를 씻어주겠다 ♧...참한詩 2011.07.26
바짝 붙어서다/김사인 바짝 붙어서다 김사인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빈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뻬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바짝 벽에 붙어선다 유일한 혈육인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저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 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 ♧...참한詩 2011.07.17
구름에 달 가듯이/유홍준 구름에 달 가듯이 유홍준 저녁 일곱시 반엔 모두들 약을 먹어요 환자복을 입은 백명의 환자들이…… 약이, 없는 자는 없어요 약을 먹지 않아도 되는 자는 없어요 폐쇄병동 밖 캄캄한 밤하늘은 밤새 노란 달이라는 알약 한 알이면 족해요 그러나 우리는 한 움큼을 먹어야 해요 하늘보다 더 많이 먹고 별.. ♧...참한詩 2011.06.28
희명 (외 1편)/강은교 희명 (외 1편) 강은교 희명아, 오늘 저녁엔 우리 함께 기도하자 너는 다섯 살 아들을 위해 아들의 감은 눈을 위해 나는 보지 않기 위해 산 넘어 멀어져 간 이의 등을 더 이상 바라보지 않기 위해 워어이 워어이 나뭇잎마다 기도문을 써 붙이고 희명아 저 노을 앞에서 우리 함께 기도하자 종잇장 같아지는.. ♧...참한詩 2011.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