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사람의 숨은 독자를 위하여/노향림 단 한 사람의 숨은 독자를 위하여 노향림 함박눈발이 아파트 창에 부딪는 날 혼자 넋 놓고 창밖을 바라보는데 6동 반장이 벨을 누른다. 긴급안건으로 모두 모이는 반상회란다. 처음으로 참석해 출석 사인을 하는데 이를 본 한 여성이 어마 시인이시네요, 젊은 날 쓰신 수필집 애독자였어요.. ♧...참한詩 2016.07.29
가을 운문사/전성기 가을 雲 門寺 전인식 운문산 꼭대기 올라 가 꽁무니 가득 노을 묻히고 돌아오는 잠자리 날개 분주한 해 어스름 때 운문사 종소리 들어 보았는가 긴 여운 세상 한 바퀴 돌아 다시 제자리 찾아 들 무렵 오늘 하루 무엇 하였던가 손금 많은 손바닥 펼쳐 본 적 있는가 멈춰 섰던 잠자리 다시 날.. ♧...참한詩 2016.07.26
열반에 든 개똥참외/전성기 열반에 든 개똥참외 전인식 흉기를 든 여름날의 폭력에도 단단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한생애 오로지 면벽(面壁) 하늘 태어난 그 자리 홀로이 마감하는 열반(涅槃)길에는 다비식도 다 쓸데없는 일 들쥐에 육보시(肉普施)한 썩은 몸 한 쪽도 아까워 이웃 들풀에 마저 공양하고 남긴 진신사.. ♧...참한詩 2016.07.26
앤디 워홀의 생각/이규리 앤디 워홀의 생각 이규리 내가 빌렸던 입술, 내가 빌렸던 꽃잎, 내가 빌렸던 손, 내가 빌렸던 여자 한데 쏟아 놓고 보글보글 끓이면 농심라면이다 퉁퉁 불어터진 면발과 식은 국물로 허기를 채우던 밤은 이제 가라 빼곡한 세상의 진열대 복제된 사랑 안에서 오늘 누가 울고 있나 추억도 나.. ♧...참한詩 2016.07.25
조연들/윤이산 조연들 윤이산 청소부가 은행나무 아래를 오가며 노란 잎을 쓸어 담는다. 나무가 다문다문 떨궈 주고 청소부는 슬렁슬렁 쓸어담고 생업에 한 번도 끄달려 본 적 없다는 듯 싱겁도록 덤덤하다 그냥 무엇의 배경 화면 같다 어느 일손 하나 서두르거나 멈추는 법이 없어 종일 해도 일은 끝나.. ♧...참한詩 2016.07.24
졸부가 되어/임희구 졸부가 되어 임희구 시가 잘 써지지 않아 오랫동안 움츠려 지내다가 지난 여름 가을 난데없이 스무 편의 시를 썼다 시 한 편 없던 내게 스무 편은 가당찮게 많은 것이어서 마음이 안정이 안 되고 자꾸만 들뜬다 느닷없이 새로 쓴 시를 스무 편이나 갖게 된 나를 봐라, 그 무엇도 두렵지 않.. ♧...참한詩 2016.07.23
봄날은 간다, 가/문인수 봄날은 간다, 가 문인수 강원도 평창군 가리왕산 뒤쪽에 사촌동생 내외가 들어와 사는 전원주택이 있다. 이 집에, 남녀 종반 간 아홉 명이 한여름 더위를 피해 모였다. 누님 셋, 그리고 사촌형 내 외, 우리 내외, 다들 60대 중후반이거나 70대 중후반이다. 세 누님은 공교롭게도 아까 운 나이.. ♧...참한詩 2016.07.22
배꼽/문인수 배꼽 문인수 외곽지 야산 버려진 집에 한 사내가 들어와 매일 출퇴근한다. 전에 없던 길 한가닥이 무슨 탯줄처럼 꿈틀꿈틀 길게 뽑혀나온다.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이 있구나.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부지기수다. 마당에 나뒹구는 소주병, 그 위를 뒤덮으며 폭우 지나갔.. ♧...참한詩 2016.07.09
한뎃잠/문성해 한뎃잠 문성해 장례식에서 돌아와 아침에야 밤잠을 잔다 돌아온 잠이 있고 돌아오지 못한 잠도 있다 병풍 앞에 둘러앉아 누군가의 한뎃잠을 지킨 사람들 그가 낯설게 뒤척이는 잠 속에 앉아 늦은 육개장을 집밥처럼 말아 먹어주고 (밤잠이 이리 환해도 될까!) 그가 켜둔 기억 속에 마지막.. ♧...참한詩 2016.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