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의 기술/정병근 유리의 技術 정병근 유리창에 몸 베인 햇빛이 피 한 방울 없이 소파에 앉아있다 고통은 바람인가 소리인가 숨을 끊고도, 저리 오래 버티다니 창문을 열어 바람을 들이자 햇빛은 비로소 신음을 뱉으며 출렁인다 고통은 칼날이 지나간 다음에 찾아오는 법 회는 칼날의 맛이 아니던가 깨끗.. ♧...참한詩 2013.12.29
신발론/마경덕 신발論 마경덕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참한詩 2013.12.29
벽시계/마경덕 벽시계 마경덕 벽에 목을 걸고 살던 그가 죽었다 벽은 배경이었을 뿐, 뒷덜미를 물고 있던 녹슨 못 하나가 그의 목숨이었던 것 생전에, 데면데면 바라본 바닥은 그를 받아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시간의 실핏줄까지 환히 꿰더니 정작 벽과의 관계는 풀지 못하고 그는 추락했다 드러난 벽의.. ♧...참한詩 2013.12.29
시비(詩碑)선생/ 도광의 시비(詩碑)선생/ 도광의 -월광수변공원에서 선생 앞엔 파랑 못물이 상큼한 입맛으로 함박눈 받아먹고 있었다 선생 뒤엔 아이스크림 콘 닮은 낮은 산들이 함박눈 맞고 있었다 박쥐우산 펴 든 커플 연인들이 함박눈 맞고 있는 선생 앞에서 키스하고 키스하고 키스를 하고 있으면 선생은 함.. ♧...참한詩 2013.12.23
마른 우물/임동윤 마른 우물 임동윤 주렁주렁 온몸에 링거 줄을 매달고 가랑가랑 숨결 잦아드는 마른 우물 하나 누워 있다 수없이 퍼내어도 늘 찰랑찰랑 만수위를 이루었던 몸 두레박만 내리면 언제나 뼈와 살과 단단한 생각들을 넘치게 담아내셨던 우물, 우리 육남매가 퍼마셨으나 하룻밤만 지나면 다시 .. ♧...참한詩 2013.12.22
참깨밭이다/장옥관 참깨밭이다 ―장옥관(1955~ ) 다글다글 깨알들 부딪는 소리 들린다 딱딱한 껍질 단칸 하꼬방 아직 풋내 나는 푸른 씨앗들이 살을 말리고 있다 온종일 뙤약볕 골목길을 쏘다니던 어린것들 머리꼭지 실하게 여물었겠다 불볕 뜨거울수록 고소하게 익어가는 참깨들 연탄 화덕에는 먹다 남은 .. ♧...참한詩 2013.12.19
공중 정원1/송찬호 공중 정원1 송찬호 말의 고향은 저 공기 속이다 공기 속을 떠돌아다니는 꺼지기 쉬운 물방울들 바람 속 고정불변의 감옥들 말과 사물 사이에 인간이 있다 그곳을 세계라 부른다 드러내 보이는 길들, 그 길을 이어받아 뒤틀린 길을 드러내 보이는 길들 도상(途上)의 영원한 도상에서 끊임.. ♧...참한詩 2013.12.16
별밥/박윤배 별밥 박윤배 뜸 잘 들인 하늘 촘촘한 밥알 지상에 머무는 동안에는 가장 맛있을 밥 배부르지는 않아도 어느 밥 보다 맛있는 밥 그대 손잡고 눈 맑아져서야 먹는 마음까지 먹는 그 밥 ♧...참한詩 2013.12.16
물빛, 크다/문인수 물빛, 크다 문인수 물은, 저를 물들이지 않는다. 팔이 긴 물풀들의 춤을 한 동작도 놓치지 않고 계속 그대로 보여주고 무수한 돌들의 앙다문 말을 한 마디도 안 빼고 노래로 다 불러낼 뿐 물아래 맑은 바닥, 어떤 의심도 사지 않는다. 물은 한결같다는 뜻, 그 힘이 참 세지만 저를 몰고 가는.. ♧...참한詩 2013.12.16
새, 날다/서안나 새, 날다 서안나 한 세계를 건너려 할 때 사람들은 비로소 제 몸을 들여다본다 죽음이나 이별 따위의 젖은 자리를 건널 때 육체처럼 무거운 것은 없다 히말라야를 넘는 새는 먼저 무거운 생각을 접는다 뼈를 접고 다리를 접어 머리와 몸통이 하나의 날개가 된다 밖을 지워버린 날개만 남.. ♧...참한詩 2013.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