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정말 얼마나 무서웠을까/이성복 아, 정말 얼마나 무서웠을까 이성복 냇물 가장자리 빈터에 새끼오리 너댓 마리 엄마 따라 나와 놀고 있었는데, 덤불숲 뒤에서 까치라는 놈 새끼들 낚아채려 달려드니, 어미는 날개 펼쳐 품속으로 거두었다 멋쩍은 듯 까치가 물러나고, 엄마 품 빠져나온 새끼들은 주억거리며 또 장난질이.. ♧...참한詩 2015.11.27
쓸쓸함의 비결/박형권 쓸쓸함의 비결 박 형 권 어제 잠깐 동네를 걷다가 쓸쓸한 노인이 아무 뜻 없이 봉창문을 여는 걸 보았다 그 옆을 지나가는 내 발자국 소리를 사그락 사그락 눈 내리는 소리로 들은 것 같았다 문이 열리는 순간 문 밖과 문 안의 적요(寂寥)가 소문처럼 만났다 적요는 비어있는 것이 아니다 .. ♧...참한詩 2015.11.27
환해진 방/배산영 환해진 방 배산영 의자 위에 까치발로 서서 전구를 갈아 끼우는 아버지. 낡은 구두 속에 감춰져 보이지 않던 하얗게 굳은살 박인 알전구 같은 아버지의 발뒤꿈치가 보인다 지금까지 어두운 골목길을 얼마나 걸으셨으면. 우리의 방을 밝혀 준 건 저 천장의 전구만이 아니었구나. 침침했던 .. ♧...참한詩 2015.11.25
일몰 앞에서/유홍준 일몰 앞에서 유홍준 저 일몰 끝에 발목을 내려놓은 그가 앉아 있다 눈멀고 귀멀어 그는 아무리 소리쳐도 대답하지 않는다 그와 나는 시소 타는 사람 같고 해와 달 같아서 누가 먼저 궁둥이를 털고 일어나면 툭 떨어진다, 하늘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해와 달을 '시소 타는 남녀'라고 부를 수.. ♧...참한詩 2015.11.17
돌지 않는 풍차/송찬호 돌지 않는 풍차 송찬호 그는 일생을 노래의 풍차를 돌리는 바람의 건달로 살았네 그는 때때로 이렇게 말했네 풍차가 돌면 노래가 되고 풍차가 멈추면 괴물이 되는 거라고 그는 젊어서도 사랑과 혁명의 노래로 풍차를 돌리지는 못했네 풍차의 엉덩이나 허리를 만지고 가는 바람의 건달로.. ♧...참한詩 2015.11.15
동/이자규 돌 이자규 넌 하늘 난 땅, 아니 내가 하늘 너는 땅 요철식의 체위 변경하는 바람을 석공이 받아 정으로 치면 칠수록 드러나는 오목과 볼록 무수히, 돌들의 짝짓기로 세워졌을 담벼락 휘영청 속내를 미리 알아 고요가 경이를 앉히고 돌담에 왕사마귀 한 쌍이 달빛을 모시고 평생 단 한 번 .. ♧...참한詩 2015.11.10
밥에 대하여/이성복 밥에 대하여 이성복 (1952~ ) 1 어느 날 밥이 내게 말하길 —참 아저씨나 나나… 말꼬리를 흐리며 밥이 말하길 —중요한 것은 사과 껍질 찢어버린 편지 욕설과 하품, 그런 것도 아니고 정말 중요한 것은 빙벽을 오르기 전에 밥 먹어 두는 일. 밥아 , 언제 너도 배고픈 적 있었니? 2 밥으.. ♧...참한詩 2015.11.10
담쟁이/도종환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도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 ♧...참한詩 2015.11.07
무등을 보며/서정주 무등(無等)을 보며 서정주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 ♧...참한詩 2015.11.07
나무와 마디/박주일 나무와 마디 박주일 나무에는 마디가 있다 쉬었다 간 자리다 혹은 그 흔적이다 달리는 열차의 마디는 역이다 나의 집은 나의 마디다 무덤은 인간이 남기고 가는 마지막 마디다 -물빛, 그 영원(2002)- ♧...참한詩 2015.11.07